[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4]목숨 걸고 새우를 잡던 시절

갯고랑에 살얼음지는 12월 잠에 취한 숭어떼 쓸어담다

경인일보

발행일 2009-09-09 제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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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업을 마치고 소래포구로 들어오는 새우잡이 어선.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 배 새로 짓고 일주 만에 비용 다 뽑아

옛 소래역에서 포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건어물 상점이 몇 곳 있다. 그 중 한 집인 결성건어물 장영수 사장은 소래포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황해도 옹진에서 온 피란민이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1969년부터 소래에서 배를 탔다. 장 사장은 아버지의 작은 목선을 물려받았다. 지금은 육지가 된 오이도 앞 바다에 나가 새우와 꽃게, 농어, 숭어, 망둥이, 주꾸미 등을 잡았다. 장 사장은 소래포구에서 최초로 기계배를 직접 건조한 세 명 중 한 사람이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다. 장순호, 임사열씨가 함께 배를 건조했다. 그때도 동력선이 몇 척 있었지만 외부에서 들여온 배들이었다.

목재는 일본에서 수입된 삼나무를 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왔고 한 척 당 배 목수 2명씩이 붙어서 한 달 만에 배를 지었다. 엔진도 국산을 썼다. 장 사장의 배는 3.19t, 다른 두 사람의 배는 5t짜리였다. 장 사장은 결성 장씨인 자신의 본을 따 결성호라 이름 붙였다. 장 사장이 새로 건조한 배로 다시 시작한 조업의 결과는 대박이었다. 쌀 한 가마니에 6천원하던 시절, 배를 새로 짓는데 146만원이 들었다. 그런데 그 비용을 1주일 만에 다 뽑았다. 송도 앞바다에 숭어 그물을 쳤는데 거기서 1주일 동안 매일같이 만선이었다. 하루에 보통 열 서너 박스씩 건져 올렸다. 날이 추워지면 숭어들은 월동을 위해 갯벌을 떠나 더 깊은 바다로 이동을 시작한다. 그때는 바다에 막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12월 24일, 25일 무렵이었다.

"갯고랑에 살얼음질 때 숭어는 반쯤 동면 상태로 떠내려가요. 거기에 그물을 뒤집어 씌웠으니. 그저 쓸어 담은 셈이었지요."

그 무렵부터 소래포구의 어선들도 규모가 커지고 노를 젓던 전마선들도 동력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오이도 앞바다 정도까지만 가던 배들이 차츰 팔미도, 초치도, 덕적도, 문갑도, 선갑도, 굴업도, 연평도까지 어장을 넓혀 나갔다. 당시 45마력의 배로 덕적도까지 5시간이 걸렸다. 850마력 엔진을 단 지금 배들은 2시간이면 충분하다. 소래포구가 번성하면서 장 사장의 배도 세 척으로 늘어났다.

   
"그물 걷느라 손톱도 갈라지고 허리 병신이 됐어요."

지금 소래포구에서 새우잡이는 보통 3월부터 시작돼 12월이면 끝이 난다. 하지만 1985년 금어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내내 조업을 했었다. 소래포구의 배들은 오젓은 잡지만 살이 통통하고 맛이 가장 뛰어난 육젓은 거의 잡지 못했다. 육젓은 신안 앞바다에서 주로 잡혔다.

새우잡이 그물은 낭장망을 썼다. 그물이 긴 주머니처럼 생겼다해서 낭장망이다. 보통 물발이 세지는 3물 때부터 새우가 들기 시작한다. 그 후 1주일 남짓 새우가 많이 나고 다시 잡히는 양이 점차 줄어든다. 새우가 나지 않는 조금 물때에는 어장 주변의 섬에 들어가 그물 손질을 했다. 그물이 보름 남짓 바다 속에 잠겨있다 보면 파래 등의 해초가 자라서 그물코를 막는다. 그래서 그물을 햇볕에 말린 뒤 해초를 털어내고 찢어진 곳은 보수해야 했다. 실제 어로는 한 달에 보름 정도. 많이 잡힐 때는 당일 소래포구로 귀항했지만 양이 적을 때는 포구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때 잡히는 새우는 배에서 바로 젓갈을 담았다. 잡은 새우를 한 배에 30드럼씩 싣고 항해를 하면 갑판이 수면에 잠길 정도로 찰랑찰랑 위태로웠다.

그물에 든 새우를 건져 올리는 작업은 보통 1시간에서 1시간30분 정도면 끝난다. 그물은 바다 속에 떨어뜨린 닻에 고정시킨다. 배를 정박시키는 닻은 행닻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지금은 닻 하나의 무게가 800㎏이나 되는 쇠닻을 쓰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참나무로 닻을 만들어 썼다. 하지만 참나무 닻은 '소'라는 벌레가 갉아먹어 오래 쓰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 소래포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인 장영수 사장이 운영하는 결성건어물.


# 오염과 개발로 멸종돼 가는 어류들

금어기가 없던 때, 장영수 사장은 어느 해 8월 15일 쯤 안산의 육도 근해까지 가서 새우를 잡았다. 새우잡이를 마치고 귀항하던 장 사장은 총에 맞을 뻔 했다. 영흥도에 해군 검문소가 있었다. 물건이 적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물건이 많을 때는 촌각을 다투며 소래포구로 실어가야 했다. 장 사장은 배에서 바로 젓을 담지 않고 생물로 운반했다. 그러니 무더운 여름이라 쉽게 상할 수 있었다. 한번은 검문에 불응하고 가려는데 검문소를 지키던 군인 하나가 실탄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운이 나빴다면 총을 맞았을 것이다. 목숨 걸고 새우잡이를 하던 시절 이야기다.

바다 오염과 간척으로 갯벌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져버린 새우와 조개들도 많다. 예전에는 푸른빛이 도는 '봉디 새우'도 많이 잡혔다. 중하 정도 크기의 봉디 새우는 중국 음식점 등에서 많이 썼다. 봉디 새우를 삶아서 말린 뒤 양파 망 같은 데 넣고 방망이로 두드리면 껍데기는 벗겨지고 알맹이만 남았다. 그 달고 고소한 새우는 인천공항이 들어선 뒤 인천 앞바다에서는 더 이상 잡히지 않게 됐다. 소래 갯벌에는 또 재첩보다 조금 큰 싸죽 조개가 쫙 깔려 있었다. 칼국수라도 해먹고 싶으면 갯벌에 나가 그냥 주어다 끓여 먹으면 그 시원한 맛이 최고였지만 이제 싸죽 조개도 멸종되고 없다.

만수동, 간석동, 신천리 등에서 내려오는 오폐수와 한국화약에서 나온 독극물로 소래갯벌은 서서히 죽어갔고 갯벌의 생물들도 멸종돼 갔다. 한국화약에서 농약을 몰래 방류해 망둥어와 전어들 시체가 갯벌을 뒤덮은 적도 있었다. 장마가 끝나면 덕적도 앞바다까지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냉장고, TV, 돼지, 호박, 맥주병, 콜라병 등 안 떠다니는 것이 없었다. 쓰레기를 밟고 다녀도 될 정도로 바다는 온통 쓰레기 밭이었다. 그물에는 물고기 대신 쓰레기만 들었다. 그물에 걸린 캔맥주를 건져 마시기도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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