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야노 히데키,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

친일청산 앞장 '임종국선생' 기리는 賞… 일본인이 공로상 받고 상금까지 '선뜻'
   
▲ 한수산 (작가·세종대 국문과 교수)
[경인일보=]지난 연말, 조촐하지만 뜻 깊은 시상식이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이나 화환이 넘치는 화려함은 없었지만 시상식장은 내내 진지했고 화기애애했다. '제4회 임종국상' 시상식이었다.

수상자들의 모습도 소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술부문 수상자는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문준영 씨였다. 일본이 이미 청산한 '식민지 법'을 한국은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는 통렬한 자성을 담아 묵묵히 일제 식민지 사법제도에 관한 연구를 이어온 문 교수의 결실을 참석자들은 박수로 축하했다. 다만 사회부문 수상자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씨의 모습이 조금은 이채로웠다.

'임종국상'이란 민족문제연구소와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친일청산에 앞장섰던 임종국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친일청산에 공로가 깊은 분들에게 주는 상을 일본인이 받고 있다니. 그는 공식 직함이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사무국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몸 바쳐 온 지난 세월을 생각하자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 아니었다. 15년이 넘게 그는 한일 과거사의 올곧은 정립을 위해 온 몸을 던져온 일본인이었다. 여러 과거사 문제를 위한 모금운동이나 변론 지원에서부터 일제강점기의 피해와 참상을 알리고 그 반성의 길을 열기 위한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일본 우익으로부터 '반일 인물'로 지목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짧은 머리에 단정한 몸매를 한 수상식장의 그는 투사로서의 이미지와는 먼 한 사람의 예의바른 일본인이었다.

지난 여름이었다. 간 나오토 일본총리의 '한일병합 100년과 관련한 담화'를 들은 것은 일본 후쿠오카에서였다.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피폭자 추모모임과 청소년 교류회를 마치고 다음 강연지로 향하는 나에게 한 젊은 일본 언론인이 다가와서 물었다. 오늘 발표된 총리의 담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강제병합 100년을 이야기해야 할 일본총리가 문화재 한 두 점의 반환을 언급한 담화는 과거사 문제 해결이라는 본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나름대로 한일과거사에 관심을 기울여왔던 나로서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더욱 그랬다. 국치 100년, 강제병합 100년을 맞으며 일본이 '선언적 의미의 반성'이라도 하기를 바랐던 원망(願望)을 뒤로 한 채 일본은 그렇게 2010이라는 중요한 매듭을 아무 매듭도 짓지 못한 채 보냈다.

일본의 전후 처리는, 처음 대두되었던 천황의 전쟁책임을 군부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고 이것을 다시 전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일억총참회'로 호도하면서 여기까지 와 버렸다. 그 일본이 근자에 와서는 원폭투하에 대하여 미국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성은커녕, 전쟁 중에 '그때 왜 자신들에게 그런 폭탄을 썼는냐'고 사과를 받아내자는 발상, 이것이 일본이다. 그러나 한일과거사에도 작은 진전은 이루어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이 그 하나다. 이 책은 지난 연말로 3천850질이 팔려나가면서 3쇄를 찍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가지는 역사와 정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뜨겁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4천389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가 기록된 이 사전의 편찬에는 국민들이 모아 준 성금도 7억원이나 들어 있었다. 인명사전에 조상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에 참여하고 도움을 주는 후손들도 많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진다.

임종국상 시상식장에서 내가 느꼈던 감회의 바닥도 거기에 있었다. 강제병합 100년을 보내면서 이제 우리는 당당히 일본의 시민운동가 야노 씨에게 친일청산에 앞장 서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상을 수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노 씨는 수상과 함께 받은 상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의 다른 시민단체에 그 상금을 희사하면서 아름다운 씨를 뿌렸다. 성숙된 한일관계가 첫걸음을 내딛는 향기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작은 향기와 씨앗들이 모여서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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