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공감

[인터뷰 "그"]다시 태어나 첫번째 생일맞은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

피랍즉시 이메일로 통보… 구출 확신 했었다
   

[경인일보=대담:심영미 문화체육부 부국장·사진:임열수차장·정리:김선회기자]일본 지진사태와 원전폭발, 리비아의 내전으로 나라 밖이 시끄러운 요즘. '아덴만의 여명작전'으로 영웅이 된 석해균(58) 선장은 우리의 관심에서 차츰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인일보 취재팀은 그가 병원에서 생일을 맞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고, 부상에서 얼마나 회복이 됐는지, 향후의 계획은 어떤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2일 오전 취재팀은 케이크와 작은 선물을 준비해 석 선장이 입원해 있는 아주대 병원을 찾았다.

-건강이 많이 회복된 것 같다. 현재 본인이 느끼는 몸상태는 어떠한가.

"용변도 불편없이 볼 정도로 내부 장기는 거의 회복됐다. 다만 총상을 입은 왼손 손목과 다른 부위들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 왼손손목이 다쳤을 때는 거의 절단된 것처럼 보였다. 끔찍했다. 그나마 수술이 잘 돼서 다행인데, 현재 손가락 2개는 감각이 살아났고, 나머지 3개는 아직까지 감각이 없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환갑이다. 병원에서 생일을 맞은 소감은.

"기자분들께서 찾아와 생일을 축하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의사와 간호사들은 물론 영양사까지 꼼꼼하게 건강을 체크해줘서 무척 황송하고, 몸둘 바를 모르겠다. 평생 이렇게 병원에 오래 입원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분들께 누를 많이 끼친것 같다. 감사드린다."



   

-최근 검찰수사에서 구출 당시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랬다. 2월말까지는 전에 있었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대수술과 마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기억력을 거의 회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구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청해부대 최영함에서 경고 메시지를 보내자 해적들이 나를 끌고 배 밖으로 나갔다. 해적들은 나를 방패삼아 우리 군인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총성이 들려 나는 순식간에 해적들이 잠자기 위해 깔아 놨던 매트리스를 뒤집어썼다. 그러던 중 배에 총을 맞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상황이 너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에 총을 맞은 뒤, 얼마 안 있어 다리 쪽에 통증을 느꼈다. 그때도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아 총에 또 맞았구나'라는 느낌 정도였다. 하지만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 기어다녀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정신만은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총을 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 명이었는지, 여러 명이었는지. 그냥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총격이 오고가고 해적들은 서로 살겠다고 도망다니며 총을 난사했다. 그래서 추가로 총상을 입은 것 같다. 확실한 건 그때 당시 해적들의 주 타깃은 나였으니, 내가 총을 많이 맞은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사실 처음 맞은 총알은 무릎 윗부분이며, 우리 해군의 유탄으로 밝혀졌는데.

"그 당시는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게다가 상황은 무척 혼란했다. 설마 우리 군인이 일부러 나를 맞혔겠는가. 작전 상황상 불가피한 사격이었을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 다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나와 똑같은 판단을 하리라고 본다."

   

-그럼 사건 당시 어느 과정까지 기억이 나나.

"부상을 입고 기어다니다 군인들에 의해 구출받고 현지 병원에 옮겨질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다. 속으로 '무조건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된다고 계속 되뇌었다. 병원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안심이 됐는지 그 때부터 의식을 잃었다."

-구출 전 해적들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하던데.

"심하지는 않았지만 구타를 당하긴 했다. 처음에는 거의 안때렸는데, 내가 배의 속도를 늦추고, 계기판의 몇몇 부품을 고장내고, 배를 지그재그로 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해적들이 화가 나 구타하기 시작했다. 어떤 해적은 나에게 총을 겨누며 영어로 "Kiil you!"하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내가 눈하나 깜짝 안하자 배에 실렸던 화학약품 통을 폭파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나는 한국어로 "쏠테면 쏴봐라. 너도 죽고 나도 죽는거지"라고 응수했다. 결국 그 해적은 아무 것도 못하더라."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았나.

"내가 평소 누구에게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 당시는 더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다. 어차피 목숨은 하나니까 두렵지 않았다. 소말리아에 끌려가서 죽으나 배 위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나를 방에 감금해놓고 외부와의 소통을 일절 차단시켰다."

-해적에게 납치됐을 당시 외부에 어떤 식으로 연락을 했나.

"납치당하자마자 회사와 청해부대에 납치사실을 이메일로 알렸다. 청해부대는 나에게 현장상황을 알려달라고 했고, 나는 해적들의 인원, 위치, 무기 등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초기대응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구출은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청해부대에 의해 구출될 것을 확신했나.

"이메일을 보낸 후 청해부대에서 답신이 오기를 배의 진행을 최대한 지연시켜 달라고 했다. 그래서 기지를 발휘해 최대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레이더로 확인해 봤더니 3~4마일 뒤에서 우리 군함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하지만 1차 구출 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조금만 더 있으면 소말리아 해적본부로 들어가는 위기를 맞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구출되던 당일(1월 21일) 새벽 3시가 되자 당직 교대하는 해적들이 이제 귀환한다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굉음과 총성 등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구출될 수 있다는 확신을 했다."

   

- 이번 일 말고 혹시 전에도 해적들에게 당한 경험이 있나.

"예전 해적은 좀도둑 수준이었다. 지난 1999년 인도네시아에서 해적을 만난 적이 있다. 새벽 4시쯤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칼을 들고 돈을 달라고 위협을 하더라. 마침 내 옆에 금고가 있었다. 당시엔 배에 오를때 습관적으로 1달러짜리 50매 정도를 묶어 몇뭉치씩 금고에 넣어놨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했던 것인데, 그 도둑은 100달러를 주었더니 내 손을 묶어 놓고 달아나더라. 줄도 느슨하게 묶어 놔서 쉽게 풀 수 있었다. 그래서 좀도둑은 두려운 게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설마 내가 당하겠나 하는 생각이 여지없이 깨진 것이다."

-해군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번 작전에 도움이 됐나.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4년간 부사관 근무를 한 것인데, 실제로 이번 작전에 도움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고 20년간 현장에서 배를 몬 게 실제 도움이 됐다고 보는 편이 맞다."

-왜 선장이 됐고, 그동안 어떤 배를 몰았나.

"주위에 배를 탔던 사람도 있었고, 군대에 있을 때 배탔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대 후 나도 배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집안이 워낙 가난해 내가 집안을 한번 일으켜 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977년에 선원이 돼 본격적으로 배를 타기 시작했으며, 1995년 선장으로 진급해 2만t 짜리 유조선을 몰게 됐다. 이후 다양한 화물선들을 몰았다."

-본인은 남들이 꺼리는 특수 화물선을 주로 몰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번에 피랍됐던 '삼호주얼리 호' 같은 경우 화학약품인 인(P), 솔벤트 등을 싣고 운반했었다. 이런 약품들이 들어 있는 화물선은 운항 심사 기준이 까다로운데, 일례로 탱크로리의 염분농도가 2PPM을 초과하면 안된다. 그래서 다른 선장들은 운항이 편한 일반 화물선이나 유조선 등을 선택한다. 사실 다른 화물선보다는 특수 화물선이 임금이 높아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일을 자주 하다보니 이제는 심사 조건도 무난하게 통과하게 됐고, 회사측에서도 내 경력을 높이 사 계속해서 이런 선박들을 운항하게 됐다."

   

-대통령까지 방문했을 정도로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부담은 없는가.

"아주대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후 한참 지나서야 내가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통령께서 방문해 '감사하다'는 말을 했을 때는 가슴이 찡하고 이상했다. 국민들의 관심이 사실 많이 부담된다. 내가 그 정도로 관심을 받을 만한 일을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배를 모는 선장이라면 누구나 배를 지키기 위해 나처럼 했을 거다. 죽기를 각오하고 해적들에게 덤볐으니까 살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퇴원후 다시 배를 탈 생각이 있나.

"물론 조건만 된다면 배를 다시 타고 싶다. 하지만 몸이 회복된다 해도 배를 탈 수 있는 신체조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승선할 수 있는 신체조건은 무척 까다로운 편이다. 현재로선 다시 배를 탄다는 것은 100% 불가능하다고 본다. 앞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

   

-해적들의 처벌은 원하나.

"재판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법적으로 죄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회복을 기다려준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한다면.

"그동안 많은 분들이 성원해주시고 걱정해주셔서 생각보다 몸이 빨리 회복된 것 같다. 이국종 교수님을 비롯해 저를 치료해주신 아주대 의료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이 은혜는 앞으로도 잊지못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취재팀에게 그는 군인식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인사를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단체생활을 많이 해서 그게 몸에 밴 것 같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억양은 영락 없는 경상도 사투리였다. 영웅이 없는 시대에 국민들에게 희망의 의지를 던져준 그는 분명 '캡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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