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한국미술관 김윤순 관장이 전시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 관장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인터뷰보다 미술관 관람을 먼저 권했다. 영락없는 '미술관 안주인'의 몸가짐이었다. 본관 1층 전시관에는 고(故) 백남준씨와 그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씨의 판화와 비디오 작품들이 있었다. 신관에는 '고려의 1세의 기도'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장성우 작가의 작품과 구성초등학교 학생들의 콜라주 작품이 눈에 띄었다. 콜라주는 이우열 평론가의 극찬을 받았다며 학생들의 표현능력을 대견해 했다. 이곳이 인사동의 작고 고풍스러운 갤러리 수준일 거란 예단은 금물이다. 30년 역사를 가진 만큼 한국미술관은 시대의 변화와 발맞춰왔다. 예술인뿐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말을 아는 그 누구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김 관장은 아끼는 작품 몇 점을 더 소개하고 나서야 미술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미술계 대모' 김윤순 관장
1983년 사설미술관 1호로 개관, 저변확대 위해 아카데미도 운영, 日오가며 공부 매진 직접 강의도, "미술은 내 운명… 아직도 즐거워"
■ 30년, 한국 사설미술관의 역사
"1983년 3월 6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하지만 한국미술을 아끼는 모든 예술인에게도 중요한 날입니다." 김 관장은 아직도 한국미술관 개관일을 정확히 기억한다. 김 관장은 "사설미술관 1호로 서울 가회동에서 개관했다"며 "당시 척박한 우리 미술문화 토양을 옥토로 개간하고자 하는 출발의 의미와 문화예술의 양적, 질적 성장에 대한 가시적인 압력으로써 우리 문화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미술관 운영방법으로는 생소했던 회원제를 도입한 데다 운영멤버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서 미술관에 거는 관심과 기대 또한 컸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미술관을 옮긴 뒤로도 한국의 어제와 오늘, 여성, 아시아, 경기도, 백남준 등을 주제로 한 의미있는 작품들이 미술관에 들어섰다. 그러는 사이 김 관장은 '대모'라는 이름을 얻었고 한국미술관은 한국의 대표미술관으로 자리잡았다.
김 관장이 미술계와 연을 맺게 된 건 미술관 관장이 되기 불과 5년 전. 1978년 전업주부로 살던 중년의 나이에 국립현대미술관 상임이사로 부임했다. 48세 때까지 미술공부를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미술이 좋았고 오래 관심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당차게 직무를 수행했다. 1981년에는 미술의 저변 확대를 위한 사회재교육 프로그램으로 '현대미술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 情, 사람을 배우는 아카데미
한국미술관은 개관과 동시에 아카데미를 개설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작품 전시 및 아카데미 준비 중 어느 것에 마음이 더 쓰이냐는 질문에 김 관장은 고민없이 '아카데미'라고 대답했다. 전시는 전문가들이 하는 게 맞다고 말하는 김 관장은 "좋은 강사를 찾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에게 강의를 부탁하기도 하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배운다"며 강의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강사의 자질을 보는 눈이 트였다는 것이다. "강의 3분만 들으면 강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김 관장은 직접 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김 관장은 1976년 일본의 '화력(話力·말의 힘)' 강의를 처음 듣고 반해서 3년동안 일본을 오가며 공부해 자격증을 따고 '파워스피치'라는 강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김 관장의 강의에 대한 열정에 비해 결과는 늘 아쉽다. 김 관장은 "초기에는 아카데미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요즘은 도립, 시립 시설에서 무료로 해주는 강의가 많다 보니 수강생이 줄어들었다"며 "1년 회비 10만원이면 미술관 무료관람에 강의까지 들을 수 있지만 미술관 위치가 교통도 불편하고 외지다 보니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아 아쉽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올해는 작가 백남준씨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자 백남준 특강을 준비하고 있다. 교육청으로부터 미술교육기관으로 선정돼 학생들을 위한 실기 수업도 진행한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강의의 차원을 높여 즐기면서 배울 수 있는 강의를 만들겠다'는 그의 다짐은 다부지고 확고했다.
■ 꿈, 김윤순과 미술
'나는 내가 만든 작은 문화 마당 '한국미술관'에서 아직도 꿈을 꾸며 즐겁게 놀고 있다'.
재작년 여든을 넘긴 김 관장은 뭇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나이에 여전히 꿈꾸며 즐겁게 놀고 있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어릴 적 일본 도쿄 유학중 한국을 방문한 오빠의 책갈피에서 발견한 최승희 무용가의 사진을 보고 무용가를 꿈꾸던 소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중년이 돼서는 미술계의 중심에 섰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오며 미술계 대모로 명성을 쌓아온 것은 많이 알아서도 아니고 예술적 능력이 탁월해서도 아니었다. 미술을 좋아하고 일로 여기기보다는 즐기는 마음, 미술을 통해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비결이었다. 고(故) 백남준씨의 아내 구보다 시게코씨와는 2006년 49제를 계기로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도 함께 작업을 도우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무려 40여년 전 권진규 작가와 인연이 닿아 구입하게 된 '지원의 얼굴'이라는 작품이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애장품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미술을 대했지만 세월이 흘러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함께 미술관을 운영하는 며느리도 환갑이 다 됐다. 그러나 김 관장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미술이 내 운명이 아니었다면 이 나이까지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는 "문턱이 낮아 놀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 되도록 죽는 날까지 노력하겠다"며 푸릇푸릇한 꿈을 내비쳤다.
▲ 한국 박물관 역사를 사진으로 모자이크 처리한 작품이 박물관 입구에 전시돼 있다. |
○한국미술관은…
미술이론·도예 등 강좌 '백미', 회원중심 전시·문화활동 활발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은 한국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자취가 진하게 배어있다. 프랑스 문화부 고문건축가를 지내고, 미국 로드아일랜드와 하버드대학 교수로도 활약했던 건축가 고(故) 김중업씨가 한국에서 두번째로 지은 서울시 가회동 건물로 첫 문을 연 한국미술관은 대지 1천652㎡, 건평 1천156㎡ 규모로 고풍스럽고 세련된 멋을 지녀 당시 한국 미술계의 자랑으로 여겨졌다. 1994년 3월 옮겨온 지금의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건물은 2천281㎡의 부지에 실내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돼 있고, 건물 연면적은 400㎡로 내부에 세 개의 전시실, 수장고, 사무실, 실습실(도자기실), 강의실 겸 도서실, 아트숍 등이 있다.
개관과 동시에 '한국미술관 문화예술아카데미'를 개설해 미술이론, 도예교실 실기반을 운영하면서 회원전을 개최했다. 지금까지 문화예술아카데미 회원들을 중심으로한 강좌와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있다. 전시회의 경우 첫 전시인 '한국인상전'을 시작으로 '현대미술인전', '한국화 어제와 오늘전', '현대조각전', '국제현대미술전', '23인의 페미니즘 전', '故백남준 추모 특별전' 등 지난해까지 200여회의 국내·외 기획전을 개최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hartm.com) 참조. 031-283-6418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저작권자 ⓒ 경인일보 (www.kyeongin.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