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브리지 플러스·3]파주 헤이리 '한향림 옹기박물관'

수수한 멋, 그 안에 담긴 흉내낼 수 없는 맛
30년 가까이 옹기와 사랑에 빠진 한향림 관장
옹기는 숨쉬는 용기… 유리관 대신 바닥에 전시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2-06-21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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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가까이 옹기와 사랑에 빠진 한향림 관장은 "옹기는 인간의 유전자가 만들어낸 작품이다"고 말했다.

진갈색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푸릇푸릇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알싸한 향기의 열무김치.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입안이 시원해지는 듯하다. 젓가락이 닿으면 팅팅 깍쟁이 같은 소리를 내는 하얀 바탕의 꽃무늬 접시에 담긴 김치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우리 그릇에 소복이 담긴 제철 음식이 훨씬 맛깔스러워 보이게 마련이다. 질그릇이 여름에만 어울리는 건 아니다. 봄철 산나물이 그득 담긴 자배기, 늦가을 고추장 된장이 담긴 장독, 한겨울 보글보글 청국장이 끓는 뚝배기 모두 정갈하고 정겨운 맛의 기억을 불러온다.

그러나 이제 우리 그릇들은 부엌 맨구석에서 이제나 저제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다. 추억속에는 있지만 현실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옹기. 그 옹기를 극진히 대접하는 곳이 있다. 감칠맛 나는 이야기가 소복소복 쌓일 것 같은 파주 '한향림옹기박물관'을 찾았다.

# 다용도 新소재

박물관 1층 전시관, 옹기로 만든 물건들이 고이 앉아있다. 옹기는 주방 식기정도로만 알았는데, 여기 물건은 쓰임이 다양하다. 오히려 기대했던 배부른 장독과 움푹한 밥그릇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원통형 몸에 팔이 달려 티셔츠처럼 생긴 '간수통'에 천일염을 넣어두면 6개월 정도 간수가 나온다. 두부를 만들때마다 짚으로 막아둔 양 옆 구멍을 열어 간수를 받았다.

   

가정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가신 중 으뜸인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단지는 귀한 것이니 만큼 좋은 재료로 만드는 줄 알았건만 이도 옹기다. 매해 햇곡식을 담아두었으며, 단지가 깨지면 집안 어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옹기로 벌통도 만들었다. 로켓처럼 생긴 벌통 아래쪽에 벌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고, 위로 뻗은 기둥모양 원통에 벌이 집을 지어 꿀이 차면 원통을 빼 꿀을 채취한다. 모기향을 덮어두던 구멍이 숭숭 뚫린 그릇은 지금도 야외에서 유용할 것 같다.

장례식에도 옹기가 쓰였다. 죽은 사람의 이름, 생일, 자손 등을 새겨 무덤 앞에 묻어두던 지석(誌石)을 옹기로 만들기도 했다. 지석은 뒷날 봉분이 무너져 분묘를 잃을 것에 대비해 만들었다. 더러는 관을 옹기로 만들기도 했다. 이밖에도 필통, 연적, 벼루, 문진, 등잔, 재떨이, 화분, 화로, 요강 등 집안 안팎에서 옹기는 요긴했다. 요즘 플라스틱만큼 쓰임이 다양했으니 삼국시대부터 수천년 우리 살림을 지켜온 다용도 소재다.

# 도자기 외모에 옹기같은 마음

2층 카페 '리모즈(Limoges)'에서 만난 한향림 관장은 의외였다. 응당 옹기를 닮았을것이라 기대했는데, 까만 드레스에 빨간 볼레로 차림으로 맵시나게 걸어나왔다. 한 관장은 "여기서 사람을 만나면 저를 보고 당황하는 분 꽤 많다"며 자신을 도예가라 소개했다. 옹기의 윤기보다 자기의 광택과 선을 떠올리니 한 관장과 그럴듯하게 어울렸다.

   

도자기 만드는 분이 웬일로 옹기를 모았을까. 한 관장은 "자기를 다루다 보니 도기 좋은 것도 알게 됐다"며 "좋은 전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옹기는 인간의 유전자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믿는 한 관장은 "사람들은 도시생활에 익숙해져도 흙을 보면 편안함을 느끼는데, 그래서 옹기는 사용하지 않아도 보면 친근하게 느낀다"며 "아직 옹기는 골동품도 아니고 유물도 아니지만 이제 보전을 위해 노력해야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헤이리마을 입주자 1세대인 한 관장은 남편과 함께 직접 이곳을 일궜다. 2004년 개관때는 옹기와 도자기를 함께 전시했는데, 공간이 부족해 조금 떨어진 곳에 '한향림현대도자미술관'을 하나 더 지었다. 박물관 두 곳을 운영하는 셈. 이곳 옹기박물관은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전시품인 옹기를 유리관에 넣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둔 것이 많다. 한 관장은 "옹기는 숨쉬는 용기라 가둬두지 않는 것"이라며 옹기 이야기를 본격 풀어냈다.

   

한 관장은 "고가의 청자 백자는 아주 고운 체에 흙을 여러번 받쳐 사용하는데, 흙입자가 너무 고와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반면, 서민들이 이곳저곳에 막 쓰던 옹기는 곱지 않은 흙으로 투박하게 성형해서 구워, 굵은 입자 사이로 난 기공으로 공기가 들락거린다"며 "신기한 것이 공기는 드나들되 물은 들락거리지 못하는 구멍이라 저장 기능은 다 하면서 발효도 잘 된다"고 옹기 자랑에 신났다.

또한 "선조들이 그런 과학적 지식을 알고 만든 건 아니겠지만 발전과정에서 모양의 변화나 쓰임의 확장이 놀라울 정도"라며 지역별로 구분해놓은 옹기의 특징을 설명했다. 경상도는 문양이 별로 없고, 전라도는 무늬가 화려하다. 제주도 옹기는 붉은색을 띠는데, 화산의 영향으로 염분 많은 흙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남부지방 옹기는 입구가 좁고 배가 불룩하나 경기지방은 원통형이다. 일조량에 따라 옹기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조절해 장이 끓는 것을 막기 위한 조상의 지혜가 만들어낸 차이다.

# 서민을 위한 명품

어린시절 새 크레파스 뚜껑 여는 것을 좋아했다는 한 관장은 그림을 제법 잘 그려 상도 곧잘 탔다. 70년대 무렵 부상해 전망이 좋다는 말에 혹해 도예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도자기 굽는 일은 아이디어 구상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과정이 막노동 수준이다. 흙을 다지고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굽는 일을 지켜보던 남편이 안타깝게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지 그랬어….'

   

프랑스에서 4년을 공부한 한 관장은 "현대도자는 미국 유럽이 우리보다 10년정도 발달했다"며 "우리는 전통을 고수하느라 늦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도제식으로 전수하다보니 속도는 느리고 창작이 안된다. 스승에게 배운대로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에 대한 재교육이 이뤄지기도 한단다. 박물관 카페 이름 리모즈는 한 관장이 공부했던 프랑스의 지명이다. 한 관장은 "유럽은 현대도자가 발달했지만 전통은 없고 산업 도자기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우리는 전통이 있지만 그 전통 때문에 현대적인 발전이 늦어졌고 그나마 전통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도자인으로서 의무감에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관리도 쉽지 않은 옹기를 30년가까이 끌며매며 다니고 있다는 한 관장은 "다행히 옹기는 다른 유물에 비해 값이 비싸지 않고 속아서 살 염려도 없다"고 한다. 옹기는 가짜를 만드는 데 돈이 더 든단다. 한 관장은 "20년 전에 비해 같은 옹기 값이 '0'하나는 더 붙었을 만큼 올랐어도 옹기는 아직 예술품이라기보다 '서민의 생활용품'쪽에 가깝다"며 "서민이 쓰기 적당한 가격에 이만한 품질이면 '명품'"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한 관장은 앞으로 세계 어디서나 '도자기'하면 '한국', 그리고 '한향림 뮤지엄'을 찾게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작은 체구지만 도자인으로서 자존심이 빛난다. 잊고 있던 우리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우리가 사립박물관을 찾게되는 이유 하나를 더 얻어온 시간이었다.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 예술마을. 1652-577. 070-4161-7271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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