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브리지 플러스·5]파주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악기; 인간이라는 존재에 영원히 따라붙는 벗
낯설고 오래된 악기 모아온 이영진 관장
우즈벡 '두다르' 방대한 수집의 시작 7~8개국어 익혀가면서 악기사 공부
연주뿐 아니라 삶 모든 부분과 연결 "미약한 한국인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2-07-12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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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민속악기 박물관 이영진 관장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두다르'라는 악기를 구입한 것이 수집의 시작이었으며 '악기는 삶의 모든 부분과 연결돼 있다'라고 강조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고, 예술마을 파주 헤이리인데다, 악기 박물관이라니 흥을 돋우는 악기소리를 기대하며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은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서늘했다. '저것도 악기일까?'싶을만큼 낯설게 생긴 오래된 악기들은 소리를 감춘 채 건조하고 서늘한 박물관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 천 점의 악기를 소유한 이영진 관장도 의외의 모습이었다. 키가 훤칠하고 억양이 도드라진

'경상도 사나이'였다.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악기 하나를 가리켜 연주를 부탁하자 "악기 연주는 안합니다"라며 두 번 청할 수도 없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리고는 "내 얘기말고 악기 이야기만 하자"신다. 머쓱해져서는 박물관 구경을 시작했다. 그런데 악기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 관장은 마법이라도 걸린 듯 달라졌다.

# 생필품

이 관장 말씀이 악기는 '연주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붙이자면, '연주도 하는 것'이다. 이 관장은 "우리나라에서는 피아노, 바이올린만 악기 대접을 받으니 악기는 당연히 연주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악기의 다양한 용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호주 원주민 '아보리진'의 악기 '블로어(bullroar)'는 비밀 의식에 사용하던 것으로, 끈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의 나무판을 공중에 휘저어 윙윙소리를 내 여자와 어린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쓰였다. 볼리비아 지역에서 병에 걸린 야마, 염소, 돼지 등의 발톱을 가죽 끈이나 막대에 연결해 만든 악기 '챠챠스(Chachas)'는 흔들면 바람소리, 혹은 빗소리가 난다.

콜롬비아 지역의 '시누플루트(SinuFlute)'는 펠리칸의 정강이 뼈로 만든 지공이 4개인 피리다. 사람의 뼈로 만든 악기도 있다. 티벳과 몽골 지역에서는 불행하게 죽은 사람의 무릎뼈로 만든 '야산갈링'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랬다. 뼈에 조각을 하거나 보석을 박아 치장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아는대로 나무나 가죽을 사용해 만든 평범한(?) 악기들도 있다. 전사의 계급과 관련된 아프리카 지역의 '볼론(Bolon)'은 가죽으로 된 현을 가진 '하프'다. 천사의 악기인 줄 알았던 하프가 전사의 것이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줄 알았던 하프가 아프리카에서 유래됐다니, 악기에 대해 거의 무지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설명을 이어가던 이 관장은 "악기는 삶의 모든 부분과 연결돼있다"며 "숟가락, 밥그릇보다 역사가 더 길고 쓰임도 신앙, 종교, 전쟁, 통신, 국가민족관 표현 등 다양하다"는 사실과 함께 '인류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 인류가 만든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물건

이 관장은 "외국에서는 악기사가 인류학에 반드시 포함된다"며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인류학 자체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운을 뗐다. 인문·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며 기초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학은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모든 시기를 아우르며,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과 문화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악기가 인류의 삶과 역사를 같이했음을 아는 이 관장은 "지금 강조하는 통섭교육에 악기보다 좋은 것은 없는데 우리나라 교육자들은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한숨을 내뱉는다.

이 관장은 "독일 프랑스 일본이 음악사에 강한데 이들은 모두 과거 강대국이었다"며 "비록 식민지에서 약탈해 연구한 것도 많지만 인류사 발전에는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런 반면 우리나라에는 인류학이나 민족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적고 박물관도 거의 없다.

악기에 대한 무지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 관장은 "스코틀랜드하면 백파이프만 떠올리는 등 악기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각한데, 이는 암기식 교육이 낳은 참담한 결과"라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기는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없고, 음악 교육은 기술연마에만 치중돼 있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최근 우리나라 연주자들이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상을 휩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죽어라고' 테크닉을 연습하기 때문이라는게 이 관장의 평가다.

   

이 관장은 "모든 음악인들이 한 곳으로 '맹목적으로 몰입'해서 그렇다"며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교수들이 자기가 배운 것만 그대로 가르치고 그게 계속 대물림 돼서 매일 같은 것만 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악기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악기사에 대해서는 이 관장을 따라잡을 '경쟁자'가 없다. 이 관장은 박물관을 찾아오는 교수들을 가르치고 학예사들에게 조언을 한다. 음악 전공을 한 적도 없고 인류학은 더더욱 배운적이 없는 이 관장이 박물관 관람객들을 위해 만든 참고용 자료가 음악 교과서에 실리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 관장은 그게 걱정이다.

이 관장은 "언젠가는 악기유물들을 인류박물관이나 민족박물관에 기증할 생각인데, 기증할 곳이 없다"며 "간혹 세계민속악기가 진열된 박물관이 있지만 이름도 틀리게 표시한 곳이 대부분"이라며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 박물관장 10년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러시아어를 전공한 것이 지금 이 관장을 만들었다. 젊은 시절 이 관장은 그 당시 형편으로는 매우 드물게 외국에서 일했다. 한국 회사에서 파견을 나간 이관장은 러시아가 아닌 '소련'에 입국하기 위해 영국에 체류하며 신분세탁을 해야했다. 국가간 수교도 이뤄지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연방공화국 소속이었던 우즈베키스탄에서 '두다르'라는 악기를 구입한 것이 악기 수집의 시작이었다. 두다르를 선택한 것은 단지 재미있게 생겨서다. 기타처럼 연주하는 이 현악기는 동아시아 유목민족이 말꼬리로 만든 것으로 지금 바이올린의 전형이다. 남한사람이 소련에 있으니 이 관장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이 관장은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왕 선물을 줄거면 악기로 달라'고 부탁했다.

모으는데 재미가 붙으면서 공부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류학, 악기사 책이 외국에는 있었다. 악기와 관련된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러시아어 책만 본게 아니다. 이 관장은 "그 때 공부하느라 7~8개국어를 배웠다"며 "유창하게 말을 하지는 못해도 책을 볼 수는 있는 정도"라니 수백가지 악기 이름과 유래한 민족, 얽힌 이야기, 쓰임새를 술술 뽑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겠다.

한창 악기를 수집할 때 이 관장은 골동품시장 가격 상승의 원인자였고, 매일매일 뭔가가 비행기에 실려 한국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운반에 든 비행기 표 값만 40억원 정도, 사용한 여권은 10여권 정도가 된다니, '한 세상 멋지게 산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관장은 '박물관을 10년 운영한 성과'로 '악기박물관 관장이 되겠다는 학생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꼽았다. 이 관장은 "어떤 학생은 초등학생 때부터 오기 시작해서 지금은 고등학생이 됐다"며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한 이 학생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오는데 맨날 악기이야기만 하고 망가진 악기를 고치기도 잘 한다"며 자식인 양 자랑을 하신다.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악기를 모으는데 많은 재산을 썼으니 좋은 가장 소리는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악기를 넘어 한국의 인류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첫인상은 까칠했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관장은 배짱있고 소신 충만한 대한민국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다보지 못한 악기들도 천천히, 꼼꼼히 둘러보면 인류 역사와 인간의 삶이 어렴풋이나마 그려질 듯하다. 강원도 영월에도 '세계민속악기박물관' 2호가 있다니 언젠가 들러보고 싶어졌다.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의 613(031-946-9838).http://www.e-musictour.com/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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