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2]도시공간의 변화

600년전 경기도에 속한 작은 郡

인천의 이름으로 지금도 확장중
   
▲ 조선시대 인천지역 행정을 담당했던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던 인천시 남구 문학동 일대. 이 곳은 조선시대 큰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 개항 이후 주목을 받게 된다. 조선시대 '부평'과 '강화'는 국방·행정·교통상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청사의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부사 집무처) 일부(왼쪽 원안)가 보전돼 있고 2001년 7월 복원한 현 도호부청사(오른쪽 원안)가 위치해 있다.

인천시 남구 문학초등학교 교정에는 조선시대 인천지역 행정을 담당했던 인천도호부청사의 객사(客舍)와 동헌(東軒·부사 집무처) 일부가 보존돼 있다.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문학동 일대를 '원(原)인천'이라고 부른다. 이 곳은 조선시대 큰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 개항 이후 주목을 받게 된다. 조선시대 '부평'과 '강화'는 국방·행정·교통상 중요한 곳이었다.

인천은 개항을 전후로 전근대, 근현대로 구분된다. 1883년 개항으로 당시의 제물포는 근대문물의 유입 경로인 국제적 항구도시가 된다. 개항장(제물포)에는 각국 조계지, 외교·통상을 담당하는 감리아문(監理衙門), 무역관세를 징수하는 해관(海關), 은행, 병원 등 서양식 공공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상하수도와 공원 등 여러 편의시설이 만들어지면서 '어촌'에서 '근대화된 도시'로 변모한다. 이후 항만시설, 경인철도, 경인고속도로, 공업단지 조성, 택지개발 등으로 인해 인천지역은 점점 도시화된다.



인천지역 도시 면적은 부평, 강화군과 옹진군 등이 편입되고 공유수면 매립이 지속되면서 넓어지게 된다. 매립을 통한 인천의 면적 확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부터 조선 광해군 때까지 100여년 동안 대 중국 통교의 관문 구실을 했다. 능허대와 그 해변은 매립돼 주거시설과 고로 등이 들어서 있다. '국제항구도시'와 '매립을 통한 도시공간 확장'이라는 인천의 특징이 잘 담겨 있는 장소이다.

# 도시공간 확장 과정

600년 전 '인천'은 경기도에 속한 작은 군(郡)이었다. 1413년 조선 태종이 현재의 인천 일부를 '인천군'으로 명명하면서 '인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

개항 전·후 전근대·근현대로 구분
1995년 광역시 격상 현재의 틀 갖춰
'원인천' '부평' '강화' 합쳐져 형성
섬의 자원화 '옹진군 편입' 큰 의미


1883년 인천항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면서 제물포에 항구와 외국인 조계가 설치된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인천지역에 '인천부'가 설치된 데 이어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으로 '인천시'로 개칭된다. 1981년 7월 1일 인천직할시로 승격한 뒤 1989년 경기도 옹진군 용유면·영종면, 김포군 계양면이 편입된다.

'인천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95년이다. 이때 경기도 강화군, 김포군 검단면, 옹진군이 편입돼 오늘의 '인천'이 됐다. 인천대 서종국(도시행정학과) 교수는 "인천이 광역시로 격상되면서 현재의 도시공간 틀을 갖게 됐다"며 "인천광역시 출범은 인천이 도약하고 크게 변화할 수 있는 전환기가 됐다"고 했다.

   

현재의 인천지역은 과거의 '원인천' '부평' '강화' 등 3개 덩어리가 합쳐진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옹진군 편입에 따라 인천 앞바다 섬들이 인천의 소중한 자원이 됐다는 점도 인천의 도시공간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사건이다.

강화는 고려시대 수도 개경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으로, 특히 여몽전쟁 때 국방상 중요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선이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겪을 때도 강화는 국방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부평은 조선 전기에 행정상·국방상 중요 구실을 했다. 인하대 최원식(국문과) 교수는 "조선은 농경 사회였다. 부평은 대단한 곡창지대였다"면서 "당시 부평은 현재의 구로구까지 포함하고 있어 조선의 한양과 매우 가까웠다"고 말했다.

원인천이 주목을 받게 된 시기는 '1883년 개항' 이후다. 인천 시가지는 개항 초기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각국의 조계지에서 시작됐다. 이후 원인천과 부평 등 내륙으로 확산됐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 건설이 시가지를 확산시키는 촉진제 구실을 했다.

   
▲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보전돼 있는 도호부 청사.세조 6년(1460년)에 도호부청사가 인천에 들어 설 때 객사의 일부와 19세기 초의 건물인 동헌이 남아 있다. 객사는 20칸 규모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중앙부의 정면 3칸 측면 2칸만이 남아 있다. 지붕의 기와에서 발견된 명문에 숙종 3년(1677년)에 수리했다고 한다. 1950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며 동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옮겼기 때문에 당초 건물의 배치형태를 알 수가 없다.

# '바다 위에 세워진 도시'

개항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서양식 도시계획' 적용과 '공유수면 매립' 활성화다.

개항장에는 일본인 전용거주지, 청국인 전용거주지, 각국인 공동거주지가 설치됐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도시계획이다. 조계지를 보면 가로와 소로에 의해 가구와 획지가 구획돼 있다. 필지별로 면적이 기입돼 있다. 공공청사와 도로, 공원, 외국인 공동묘지 등 도시시설도 배치했다.

항만시설·공단 확보위해 '매립' 시작
1960~70년대 공업지역 형성 급성장
2000년대 공항 개항·경제구역 지정
위성도시 탈피 독자적 도약발판 마련


   

1906년부터 인천항 시설 확장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인천지역 매립은 항만시설과 공업단지를 확보하기 위해 시작됐다.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제철 등의 기업이 자리잡고 있는 땅도 매립지다.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역시 전체 면적(약 118㎢)의 절반 정도가 매립된 곳이다. 중구, 동구, 서구는 행정구역의 50% 이상이 공유수면 매립에 의해 형성됐다.

1960~7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공업지역이 형성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시가지가 동서 방향으로 확장돼 갔다. 1980년대에는 연수택지개발지구와 남동공업단지(현 남동인더스파크) 등이 개발됐다. 1990년대에는 계산택지, 삼산택지, 검암구획지구, 검단지역 등 북부지역 개발이 이뤄졌다.

   

2001년 영종도에 인천공항이 들어서면서 인천은 대한민국의 관문이 됐다. 2년 뒤 송도, 청라, 영종 등 3곳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다. 송도국제도시의 경우, 현재에도 공유수면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

공항 개항과 경제자유구역 개발은 인천이 서울의 위성도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도약을 시도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2009년 개통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사장교인 인천대교(송도~영종, 총연장 21.38㎞)도 공항과 경제자유구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5월 서해와 한강 하류를 연결하는 경인아라뱃길(길이 18㎞의 수로)이 정식 개통됐다. 경인아라뱃길 조성은 환경파괴와 경제적 타당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사업.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도시계획적으로 보면 인천 도시공간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경인아라뱃길 수로변 토지이용이 어떻게 이뤄질지 주목된다.

글/목동훈기자 사진/임순석기자

경인일보 포토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목동훈기자 기사모음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