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⑩ 강화도

행정구역으로 묶지 못하는 그들 스스로 半 인천사람이라 부른다
   
▲ 지난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으로 편입된 강화군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半) 인천사람'이라 부른다. 행정구역 상 인천시에 속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인천과는 동화될 수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 김포 문수산성에서 바라본 강화도 전경. /임순석기자
인천편입당시 반발… 아직 경기도 환원 주장
토박이 아니면 어울리기 힘들어 '배타적'
전란 속 상처입은 주민 피해의식 더해진 탓
한국전때 민간인끼리 학살이 '트라우마'로

반면 조봉암 등 개혁·진보 인물 많이 배출
성당 청년회 주축 '심도직물 노동 운동' 유명
김포 거쳐야하는 비월지적 특성도 불통 원인

   

인천사람들은 강화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강화군은 행정구역상 인천시에 속해 있고, 이곳 사람들도 엄연한 인천시민인데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말이 안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화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반(半) 인천사람'이라 부른다. 행정구역상 인천시에 속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인천과는 동화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이다.

경기도에 속해 있던 강화군이 인천에 편입된 것은 1995년이다. 인천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에 포함돼 있던 강화군과 옹진군, 김포군(현재 김포시) 검단면 등이 인천에 편입됐다. 어떻게 보면 인천을 지금의 광역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 준 곳이 강화·옹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 편입 당시 강화군 주민들은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벌였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간간이 강화도의 경기 환원론을 주장한다. 강화사람들이 자신들을 반인천사람이라 부르는 것도, 경제·문화·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인천과는 다른 강화도만의 특수성이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산, 고인돌, 전등사, 고려의 왕도, 신미·병인양요…. 우리가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역사서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화에 대한 정보는 많다. 강화사람들이 말하는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역사책이 가르쳐 주지 않는, 이곳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삶과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강화 고인돌
# 닫힌 공간 강화도, 배타적인 그들

"타지 사람들한테 이렇게 배타적인 곳은 처음 봐요." 지난 19일 강화읍에서 만난 한 향토사학자는 강화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묻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1986년부터 강화도에서 교편을 잡다 최근 퇴직하고, 이곳의 역사를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런 말을 이름을 밝히고 하면 큰일 난다며, 손사래를 쳤다. 타지에서 강화에 정착해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엔 강화도 사람들만의 첫번째 특성을 배타성과 폐쇄성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강화 토박이가 아니면 쉽사리 그들과 어울리기 힘들고, 남한테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는 것도 꺼린다. 다른 지방에도 이런 특색이 있지만 강화는 해도 너무하다는 것이다.

인천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강화 주민들의 특성에 대해, 섬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지역성에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다치고 상처 입은 이곳 사람들의 피해의식이 더해진 결과라고 말한다.

인천발전연구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김창수 박사는 "몽골과의 전쟁, 신미·병인양요 등 강화도가 여러 전란을 겪었지만, 근대에 있어서 강화도 사람들을 더욱 배타적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이 한국전쟁"이라고 말했다.

   
▲ 광성보는 강화도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진보(鎭堡)로, 1871년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한국전쟁 당시 강화도 내에서는 군(軍)에 의한 학살이 아닌 지역민들끼리의 학살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전장이 남과 북으로 펼쳐지면서 육지와 떨어져 있던 강화도는 남북 양측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가 됐다. 강화 내부의 좌익 세력과 북한에서 피란온 사람들로 구성된 민간인 비정규 군대간 끊임없는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혈연관계로 얽혀 있고,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 수 있는 이웃사촌간 벌어진 이런 끔직한 학살의 기억은 이곳 사람들이 더욱 안으로 숨을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것이다.

2006년 김귀옥씨는 '경제와 사회' 가을호에 쓴 '지역의 한국전쟁 경험과 지역사회의 변화'란 제목의 글에서 교동도에서 벌어진 민간인들끼리의 학살에 대해 '1950년 한국전쟁은 침묵을 강요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냉전의 시계가 작동해, 교동도는 아래로부터 불신과 반목이 깔려 배타성이 더욱 깊어졌다'라고 서술했다.

   
▲ 강화읍사무소 인근에 있는 심도직물 터. 강화군에서 용흥궁 공원을 조성해 지금은 강화군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다.
# 열린 공간 강화도, 개혁·진보적 인사들의 산실

이런 강화도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지역적 특성과는 정반대로, 강화에서는 기존의 사상과 사회적 이념을 뒤엎은 개혁·진보적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중국 중심의 주자학을 비판하며 실사구시, 인간중심의 학문을 외쳤던 강화학파의 효시 정제두(1649~1736년)와 이런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 후기의 명필가 이건창(1852~1898년) 선생은 강화를 기반으로 양명학을 태동시키고 발전시켜 나간 인물들이다.

근대사에 있어서는 평화통일론과 농지개혁 등을 과감히 주장했던 죽산 조봉암(1899~1959년)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밖에 1920~1940년대 인천지역 노동, 교육, 사회운동의 중심에 섰던 유두희(1901~1945년) 선생도 꼽을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70~1980년대 이전에 이미 강화도에서 대규모 노동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1968년 강화 심도직물공업주식회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벌인 파업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강화에는 20여개의 직물공장이 밀집돼 있었고, 그 종업원 수만 4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심도직물은 그중에서도 직원들이 1천2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직물공장이었다.

   
▲ 4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68년, 심도직물 노동자들은 강화성당 가톨릭청년회와 함께 불합리한 노동 현실에 맞서 파업을 벌였다.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고, 강화군은 심도직물이 있었던 강화읍사무소 인근에 공장 굴뚝 일부를 보존해 놓고 있다.
이 곳에서 천주교 강화성당의 가톨릭청년회(J.O.C)가 '섬유노조 심도직물 분회'를 결성했고 임금 인상, 노동시간 시정 등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회사측과 맞선 파업을 벌였다.

강화 향토사학자 김경준(66)씨는 "파업때 여공들이 썼던 혈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며 "당시 한국가톨릭청년회 주교 자격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강화성당을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 추기경은 강화성당 미사에서 "억눌리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가톨릭청년회에 존경을 표한다"며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당 역사가 증명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사회정의 실현과 노동자들의 인권 수호를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폭넓게 퍼져나갔다고 한다.

강화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지역적 풍토 속에서도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고, 개혁·진보적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사실은 강화도만이 갖고 있는 역사적 아이러니(irony) 이기도 하다.

   
▲ 심도직물 근처에 있는 천주교 강화성당. 강화성당 가톨릭청년회는 심도직물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벌였고 당시 한국가톨릭청년회 주교 자격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강화성당을 찾기도 했다.
# 강화도의 지리적 특성과 사투리

강화도는 행정구역 상 인천에 포함돼 있지만, 인천 도심 사람들은 쓰지 않는 사투리가 있다. 말미에 붙는 '~하시겨', '~하시껴' 같은 특유의 어법이 존재한다.

류중현 강화문화원 부원장은 "강화도의 경우 고려의 피난처였고, 6·25 이후에는 황해도, 개성 사람들이 많이 흘러들어 왔다"며 "강화도 사투리도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화도만이 갖고 있는 지리적 특수성도 눈여겨볼 만하다. 섬이란 일반적 지리적 특성 외에 비월지(飛越地)란 행정구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비월지는 다른 마을을 뛰어넘어 있는 행정구역을 말한다. 즉 인천에서 볼 때 강화는 같은 행정구역임에도 경기 김포를 거쳐 가야 하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다.

강화도가 인천 땅인데도 김포시를 거쳐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비월지적 특징 때문에 강화도 사람들은 1995년 인천 편입 당시, 생활권과 경제권 등이 모두 김포와 연결돼 있어 인천과의 통합은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김창수 박사는 "인천과 강화의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 중 지리적인 것이 바로 강화도의 비월지적 특성"이라며 "전국에서 이런 비월지 성격을 갖고 있는 곳은 강화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글 = 김명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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