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해적의 일본 침입과 동아시아 인구이동

김창겸

발행일 2013-05-13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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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9세기 신라·당·일본서 발생한
많은 유이민은 동아시아를
혼란속으로 몰아갔고
인구이동은 3국에 심각했지만
인적·물적 교류로써 상호작용
東亞 변화발전의 요인이었다


9세기 중국의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은 다함께 혼란에 빠졌다. 그 현상의 하나로 동아시아에서 해적의 극성과 인구 이동을 들 수 있다. 신라 역시 정치사회 변동으로 많은 유이민이 발생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해외로 이동하였다.

특히 바다 건너 일본 서부 연안으로 진출한 많은 신라인의 잦은 출현을 일본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일본에 나타난 신라인의 모습은 오랜 표류와 굶주림에 지쳐 처참하였다. 게다가 자신을 지키고자 무장을 하고, 많은 수가 무리를 지어 활동하였으며, 때로는 연안지역에 불법 상륙하여 노략질하거나 공물을 약탈하는 해적집단 모습이었다. 이런 이유로 대마도와 일본 대재부를 비롯한 서부지역 관민이 공격을 받아 다치거나 죽은 자도 부지기수였다.

일본 역사서에는 신라인들이 일본의 풍속과 교화를 흠모하여 자발적으로 귀화하였고 일본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돌려보냈다는 식으로 자국 우월에 입각하여 기술된 것이 보인다. 하지만 신라인들이 일본에 간 이유와 배경은 일본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측에 더 있었다. 물론 단순한 표류의 경우는 태풍과 폭우 등 자연재해가 이유이다. 그리고 상인들은 부의 획득 대상지로 일본을 선택하였다. 반면에 피난민이나 범죄자, 유망민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일본으로 진출한 것이다. 이 경우 신라인들은 생활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세계를 찾아 나선 생존투쟁이었다.

이렇게 출몰하는 신라인들이 많아지고 빈도가 잦아짐에 일본에서는 이것을 신라인의 침공이라 여기고 공포감이 조성되어 심각한 정치사회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다양한 대비가 있었다. 처음엔 단순 표류인으로 보고 귀국조치하거나 귀화인으로 받아들여 안치하였다. 그러나 869년에 발생한 신라 해적의 공물 약탈사건을 전후하여 그 반응과 대책은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중요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여 경계경비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에서는 신라인의 출몰과 약탈행위에 불안해진 분위기를 틈타 조만간 신라의 침공이 있다거나, 신라인과 연계한 반란을 도모한다고 고변하는 정치사건이 발생하는 등 매우 흉흉하였다. 게다가 신라가 침공하면 일본 대재부 관내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이 내응할까 염려하여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 표착 신라인을 추방하듯이 귀국 조치하였으며, 그들의 상륙을 저지 퇴치하고 때로는 추격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한편으로는 여러 신사의 신들과 사찰의 불상에가호를 빌어 막고자 노력하였다. 9세기 말에 신라 해적의 침입이 더욱 극심해지자 일본 조정은 신라 해적 토벌군을 편성하여 대대적으로 추포하였다. 그러나 신라 해적의 출몰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9세기 많은 신라인의 진출이 일본에 끼친 파급 효과는 대단히 컸다. 특히 극성스러운 신라해적의 잦은 출몰과 침공 위험은 종전 일본의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었던 대외교류 방향을 이후 한동안 소극적이고 배타적이며 패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하였다. 한편 신라인들의 일본지역으로의 활발한 진출은 인구 이동과 함께 문물의 전파가 이루어져, 일본의 역사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요인이 되었다.

일본 특수지역에 인구를 보충하고 성씨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우수한 신라 기술과 문물을 일본으로 전하는 전파자 구실을 하였다. 일본은 신라 해적선에 대응하려고 신라의 우수한 건조술을 배웠다. 또 신라 병기의 제작기술을 습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신라인들이 이주함에 불안과 위협을 느낀 자국내 일본인들의 유망을 방지하면서, 신라인 침공에 대비해 해안지역에 축성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들의 침공을 불교의 힘을 이용하여 막고자 하여 사찰의 신축이 있었다.

결국 9세기 신라와 당, 일본에서 발생한 많은 유이민은 동아시아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이것은 연계 작용하였다. 간혹 해적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신라와 당과 일본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지역간 인적 물적 교류로써 상호 작용하였고, 당시 동아시아의 변화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었다.

/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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