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옥자 경기시민사회포럼 공동대표
은퇴후 해오던 일이나
주변사람들과 관계 정리하고
오로지 자신에 몰두할 수 있는건
내면과의 깊은 대화의 결과이다
인생의 가장 젊은날인 오늘이
결국 남은 인생길을 결정하는것


얼마 전 대학 교수직을 조기 퇴직하고 전남 고흥에 둥지를 튼 지인을 만나고 왔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4시간, 다시 승용차로 40분 정도 거리의 작은 마을에서 그는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전원생활하면 으레 떠오르는 서양풍 전원주택도, 고풍스러운 한옥도 아니고 그 마을 네댓 채 집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33㎡여의 어촌주택이었다. 집주변 작은 공터에서는 고추와 상추, 오이, 토마토가 자라고, 오가는 길섶에는 백일홍, 봉숭아, 채송화 등 오래전부터 보아온 꽃이 한창이다. 툇마루에 앉으니 앞이 툭 트인 가운데 작은 섬이 오밀조밀 바다풍경을 그리고, 작은 만 가장자리는 해송이 울울창창하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어촌 풍경이 고스란히 앞마당을 채우고 있다. 부인은 아직 출가 전 자식들 부양으로 서울살이를 하고, 남편 혼자 낙향을 해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그를 보며 우리 모두는 그의 용기와 결단, 그리고 그의 선택에 동의해 준 가족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멀지 않은 날 자신에게 닥치는 늙음의 시간과의 조우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싱싱한 회접시를 앞에 놓고 소줏잔을 기울이며 고흥살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독일 유학을 포함 30여년 연구와 가르침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이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느날 문득 국내 유수 대학 교수라는 껍데기 속의 낯선 자신과 대면하면서 자신에게 너무 미안하고, 아쉽고, 허망한 생각이 들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기 퇴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 후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 후 살 곳을 정하고, 집을 마련하고 그리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단출한 삶을 10년간 충분히 즐기고 그 후는 다음 다시 생각할거라며 구릿빛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보인다. 진짜 행복해 보인다.



리차드(Reichard)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은퇴 후 사람들은 다음 다섯가지 적응 유형을 보인다고 한다. 첫째는 성숙형으로 은퇴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과거의 실패와 성공도 그 사실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형이다. 자기 자신의 일생을 매우 값진 삶으로 느끼고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은퇴 후에도 일상생활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경우로 주변 사람 및 가족들과 관계도 유연하고 성숙된 모습을 보이는 경우이다. 은둔형은 일생의 무거운 책임을 벗어 던지고 복잡한 대인 관계와 사회 활동에서 해방되어 은퇴 후 조용하게 지내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역할을 점차 축소시키면서 개인적 생활을 향유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유형이다.

무장형은 도리어 은퇴를 하면서 사회적 소외와 늙어감에 대한 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사회적 활동과 기능을 유지 확대하는 형으로 노화에 대한 적응력이 조금 부족한 유형이다. 이 유형은 은퇴 후 일을 벌이다가 도리어 퇴직금마저 탕진, 매우 어려운 노후를 보내게 될 수도 있어 주의가 요구되는 유형이다. 분노형은 젊은 시절 인생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늙어버림에 대해서 비통해하고 모든 원인을 자신 속에서 찾기보다는 외부 요인에서 즉, 가족, 경제사정, 사회에 돌림으로써 남을 질책하고 늙음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형이다. 화를 잘 내고 공격적이라서 가족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자학형이 있다. 분노형과는 달리 인생 실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 나이가 많아질수록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여기고 대부분 관계를 끊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심한 경우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는 형으로 모든 유형 중 은퇴에 대한 적응이 가장 낮은 유형이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또 늙어간다. 언젠가는 지금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 주고 돌아서야 한다. 인생 삼모작을 해야하는 시기에 어떤 모습일지는 오늘 내 삶의 모습이 결정할 것이다. 고흥에서 만난 지인처럼 은퇴 후 해오던 일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오로지 자신에 몰두할 수 있음은 내면과의 깊이 있는 대화와 성찰의 결과이고, 오늘 열심히 산 선물일 것이다.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이 결국 남은 인생길을 결정할 것이다.

/한옥자 경기시민사회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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