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③ 화교 (下)

발 묶고 돈 묶인 지난한 시련

'짜장면' 만이 우리는 아니다
   
▲ 그래픽/박성현기자
해방이후 한국 정부의 견제로 무역상들 치명타
한국전쟁당시 중공군 개입 따가운 시선 견뎌야
해외취업·관광가이드·보따리상… 3세대들 변신
차이나타운, 중국 전통 문화공간으로 발전 기대


해방 이후 일제가 물러간 이후에도 한국의 화교사회는 또다른 고난의 시기를 보낸다. 한국 정부의 정책이 바뀜에 따라 부침을 겪으며 생존을 위한 고민과 선택에 내몰렸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화교들은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화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봤다.



# 해방과 한국의 화교 견제

해방 이후 화교들은 일제가 아닌 한국 정부의 '견제'를 받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외국인 출입 규제와 외환 규제가 이뤄진다.

이 때문에 화교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고, 화교 무역상들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은행에서 환전이 불가능해지다 보니 공식 환율보다 3~4배 비싼 암시장에서 외환 거래를 했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는 전국에 외래상품 불법 수입을 금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에 대한 창고 봉쇄 조치가 내려진다.

당시 무역업을 주도했던 물건을 대량으로 사뒀다가 시기를 봐서 매매하는 화교 무역상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인천항과 차이나타운 주변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 함대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화교들은 한국 사람에게서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1961년에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 소유가 금지됐고, 화교들은 채소 경작지를 잃게 된다.

한국인의 명의를 빌려 땅을 사기도 했지만, 사기와 배신 등으로 경작지 소유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 인천화교중산학교 전경. 1901년 4월 청국 영사관 근처에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193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때 재학생이 1천여명에 달했다. 현재는 450여명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임순석기자
1968년에는 외국인 토지소유금지법이 변경,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었고, 주택 면적은 660㎡ 이하, 점포는 165㎡ 이하 내에서만 취득이 가능하게 된다.

1953년과 1962년 두차례 진행된 화폐 개혁도 화교들에게는 타격이었다. 화교는 주로 재산을 현금으로 보유했는데 교환 한도 때문에 휴지 조각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70년에 한국 정부는 짜장면 값을 동결시켰고, 쌀을 아끼자는 절미운동을 이유로 중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했다.

쌀밥 판매금지조치는 3개월 만에 해제됐지만, 이 시기에 중식당에서는 볶음밥을 팔지 못했다. 밥을 판매하다 적발돼 영업정지를 당한 곳도 있었다.

한국에서 토지소유가 제한되고, 은행거래를 원활하게 할 수 없었던 화교들은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창업도 힘들었다. 화교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화교 2세대까지는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대로 살았다면 3세대는 달랐다. 해외로 이주를 꿈꾸거나 친지를 통해 해외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했다.

인천의 화교들은 대만에 가서 식당, 공장, 일반기업, 시장 등에서 일을 했고 임금 수준은 한국보다 높았다.

중국어와 한국어가 모두 가능한 이들은 관광가이드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 인천의 화교들은 대만, 일본 등을 오가며 국제경제 감각을 익혀 보따리상 등 돈 되는 일들을 찾기도 했다.

   
▲ 청국 영사관 회의청. 화교중산학교 안에 위치해 있다. 청국 영사관의 회의시설로 1910년 건립 당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다. /임순석기자
# 한중수교와 화교

1992년 8월, 한국정부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는다. 당시 화교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한국에 살며 대만식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화교들이기에 충격이 컸다.

화교 사회에서는 '감정적 한국정부가 세련되지 못한 단교를 했다'거나 '일방적인 통보였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인천의 화교사회에 닥친 직접적인 시련은 없었다.

오히려 한중 수교로 중국과의 무역이 확대되며 새로운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

한국과 중국을 오갔던 대 중국 보따리상 중에는 매월 수억원씩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한중 수교 이후 빠른 속도로 조선족들이 유입된다.

이들은 한국의 화교와 경쟁자가 됐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화교들이 조선족들의 유입으로 손해를 많이 보는 경우도 있었다.

2005년에는 영주비자가 신설되고, 그해 8월에는 선거법이 개정되며 지방선거권이 생겼다. 2006년 5월 31일 첫 지방 참정권 행사가 이뤄진다.

   
▲ 북성동 차이나타운. /임순석기자
# 차이나타운과 화교의 미래

인천시 중구는 북성동 일대에 단계적으로 차이나타운을 조성, 지금의 모습이 완성됐다.

3개의 패루를 설치하고 한중문화관을 건립했고, 도로 정비 등을 통해 중국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차이나타운을 조성했다.

짜장면박물관 등을 개관하며 차이나타운은 나름 지역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들어 중구는 북성동 일부 지역에 한정된 차이나타운 특구를 송월동 일대까지 확대하는 구상을 내놓았다.

인천항에 꾸준히 입항해 머무르는 크루즈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더 넓고 다양한 차이나타운을 만들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하지만 화교 사회에서는 부족함과 아쉬움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짜장면타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음식보다는 중국의 역사, 전통 문화와 예술 공연 등을 종합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태화원을 운영하는 화교 2세대 손덕준씨는 "중국 관광객을 겨냥한다고 할 때, 짜장면이 그들의 관광 욕구를 자극할 만한 요소가 아니다"며 "한국에 정착한 중국인들의 역사를 소개하는 화교 역사 박물관이나 각종 문화 축제 등 콘텐츠가 보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 김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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