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上)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 떠난 한국인 86명, 첫 하와이 땅 밟다
사탕수수 노동자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방랑하는 유태인>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3-08-15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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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이민자. 1900년대 초반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연도와 장소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1883년 인천항 개항은 근대 문물 유입의 시발점이 됐지만, 한편으로 인천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1902년 12월 22일 121명의 한국인이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간 것이 우리나라 첫 번째 공식 이민 기록이다.

이후 1905년까지 7천여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이들은 낯선 땅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인 공동체를 만들어 자녀들을 가르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상편에서는 하와이 이민 과정과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국내 최초 해외 선교사 홍승하를 소개한다.

웨인 패터슨의 책 '아메리카로 가는 길'을 비롯, 국내외 하와이 이민 관련 서적과 논문을 참고했다. 하편에서는 하와이 이민 1세대와 후손들의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 1912년 일제강점기 시절 지영희(황해도 옹진)가 하와이에 먼저 이민 간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발급받은 여권./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이덕희 기증
# 가자, 아메리카로!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배 '켄카이마루'가 한국인 121명을 태우고 나가사키로 떠났다.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121명 가운데 19명은 일본에서 실시된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은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Gaelic)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이 중 16명은 병에 걸려 귀국길에 올랐고, 86명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들은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 모쿨레이아(Mokuleia)에서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정도 일했는데, 당시 성인 남자 월급은 17달러였다고 한다.

1900년대 초 하와이 이민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부족과 우리나라의 열악한 정세가 맞물려 이뤄졌다. 여기에 미국 영사관 알렌(Allen) 공사가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농업이 일찍이 이뤄져 1850년대부터 중국인을 비롯 일본인, 포르투갈인, 독일인 등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1897년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하는 조약이 체결됐고, 당시 미국의 '중국인 입국 금지법'이 하와이에도 적용돼 중국인 노동자 도입이 중단됐다. 이에 하와이 정부와 사탕농장주협회는 중국인의 대안으로 한국인들을 제시한다.

   
▲ 하와이 이민자 명단.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첫 이민자 102명의 이름이 영문으로 기록돼 있다. /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소장(사진은 복제품)
한편, 한국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극심한 가뭄과 홍수 등으로 기근이 계속됐다. 일본이 한국의 쌀을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국내 양곡시장마저도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1902년 2월 미국으로 휴가를 떠난 알렌 공사는 캘리포니아에서 하와이 사탕농장주협회 어윈(Irwin)을 만나 "한국 노동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알렌 공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한국인 노동자를 하와이로 이민을 보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 굶주린 백성들의 어려움 극복 등을 이유로 내세운 알렌 공사는 1902년 3월 고종의 윤허(允許)를 얻어냈다.

알렌 공사는 여권 발급 업무를 보는 유민원을 신설하고, 미국의 사업가 데쉴러(Deshler)를 한국인 이민 모집책으로 선정했다.

데쉴러는 신문광고와 공고, 인천 내리교회 도움 등으로 이민자를 모집했고, 1905년 8월 8일 공식 이민이 끝나기까지 총 7천415명의 한국인을 하와이로 보냈다.

하와이 이민은 1905년 4월 초 고종이 이민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 종료된다.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일본 노동자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민금지령 이후 2천여명의 한국인이 고국으로 돌아왔고, 5천여명은 하와이에 남았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사업을 벌이거나 로스앤젤레스 등으로 진출해 새로운 한인사회를 만들었다.

   
▲ 하와이 이민자 명단.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첫 이민자 102명의 이름이 영문으로 기록돼 있다. /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소장(사진은 복제품)
# 인천과 하와이 이민

하와이 이민의 중심에는 인천과 기독교가 있었다.

인하대 이영호(사학과) 교수는 "첫 이민선이 인천에서 떠난 것, 이민회사 본사가 인천에 있었던 것, 인천이 수도 서울의 관문인 점 등에서 하와이 이민의 연고를 찾는다면 응당 인천이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83년 개항 이후 제물포엔 개항장을 총괄하는 인천해관과 인천감리서가 설치됐고, 각국 영사관과 조계가 들어선다.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빠르게 설립됐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폐쇄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변화시켰다.

하와이 이민 책임자 데쉴러는 인천 내리교회 인근에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하고, 이민자 모집에 본격 들어갔다. 같은 건물에 이민 비용을 대출해 주는 데쉴러은행도 설립했다.

한국인들은 고향 땅을 버리고 타지로 떠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어 이민자 모집이 쉽지 않았다. 여기서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하와이 이민사업에 힘을 보탠다. 존스는 신도들에게 "하와이는 기후와 경치가 좋고, 원주민들을 선교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 일본 나가사키에서 호놀룰루까지 첫 하와이 이민자를 실어나른 갤릭호. 1885년 아일랜드에서 건조된 4천206t 규모의 배로 모두 6차례에 걸쳐 이민자를 수송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갤릭호에 탄 1차 이민자 102명 중 제물포, 부평, 강화 등 인천 출신이 8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는 존스 목사가 인천지역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하와이 한인 공동체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기독교가 자리잡게 된다.

제물포지방교회사를 연구한 동탄감리교회 홍석창 원로목사는 "하와이 이민사를 얘기할 때 기독교는 빠질 수 없는 존재"라며 "이런 이유에서 오늘까지 교회는 미주사회에서 지주 역할을 해왔고, 1920년대에는 교회가 중심이 돼 각종 성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인천항 개항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인 동시에 디아스포라(방랑하는 유태인·우리나라의 경우 한말 이후 대규모로 해외로 이주해 나간 재외 한국인)의 출구이기도 했다.

1860년대 북방지역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중국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월경해 토지를 개간하며 생업을 일군 것과 달리, 하와이 이주는 합법적인 이민이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국인의 정체성 유지,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 등은 다른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다르지 않았다.

   
▲ 1903년 8월 6일 하와이 이민자를 모집하기 위한 고시./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소장(사진은 복제품)
홍승하 전도사 최초로 하와이 선교길
한국인 감리교회 초대 담임목사 맡아
일제 대항·단결 자치모임 '신민회' 조직


1903년 하와이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인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나왔다.

하와이 이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는 영흥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전도사 홍승하를 하와이 선교사로 파송한다.

홍승하는 1863년 옹진군 영흥면(당시 남양군) 내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독교를 만나게 된 계기는 조금 특별했는데, 1890년대 후반 서울에서 일본인 순사의 따귀를 때리고 도망치다 숨어들어 간 곳이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 집이었다고 한다.

아펜젤러 집에서 기독교를 접한 홍승하는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전도했다. 여기서 존스 목사를 만나게 됐고, 1902년 5월 전도사 임명을 받아 영흥도 일대를 담당하게 됐다.

전도 활동의 탁월함을 인정받은 홍승하는 이듬해 가을 하와이 전도사로 낙점됐다.

하와이에 도착한 홍승하는 1903년 11월 감리교 피어슨 감리사와 함께 한국인전도회를 조직하고 한국인감리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된다.

   
▲ 유민원에서 이민 관련 업무를 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는 1902년 11월 27일자 황성신문 복제본. 원본은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홍승하는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고 동족간 단결을 위한 자치모임 '신민회'를 하와이에서 조직한다.

신민회는 한국인들의 교육과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기독교 공동체로 시작해 점차 정치적·사회적인 색채를 띠게 됐다.

홍승하가 조직한 신민회가 1907년 안창호 등이 국권독립운동을 위해 결성한 신민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하지만 인적 구성, 같은 명칭을 사용한 점을 보면 어느 정도 밑거름이 됐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홍승하는 1904년 귀국 후 강화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06년 인천 영화학교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1918년 지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수원에서 주로 활동한다.

수원대 박환(사학과) 교수는 "인천 출생으로 내리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홍승하는 굉장히 주목받아야 할 인물임에도 주목받지 못했다"며 "하와이 초기 이민사회에 끼친 영향도 컸고,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운동 발전 과정에서도 기여가 아주 큰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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