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⑤ 하와이 이민 (下)

'낙원'으로 간 무명의 애국지사들
한인사회 '열정의 뿌리' 되다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3-08-22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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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 초기 정착인 모습(연대미정). /인하대 총동창회 제공
이름아닌 '번호'가 신분증 역할 농장관리자 '루나' 채찍들고 감시
독립운동·교육에 헌신적 모습… 1906년 '한인기숙학교' 첫 설립
1907년 자치단체 '한인합성협회' 결성·2세대 '정체성 유지' 힘써


지상낙원을 꿈꾸며 하와이로 떠났던 이민 1세대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농장주 감시를 받으며 적은 임금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지만 자식들을 가르치고 조국의 국권회복을 돕는 데는 물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250만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이 됐다. 하와이 동포들은 이들을 '뿌리'라고 표현한다.

   
▲ 함호용 가족사진. 1914년 촬영된 함호용 부부와 자녀들. 한복을 입고 있는 아내와 달리 콧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고 있는 함호용의 모습이 눈에 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삶

1903년 8월 고종이 각처에 붙인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공고에는 '기후 온화', '영어 교육', '학비 무료'라고 적혀 있었다.

하와이 이민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도 신도들에게 하와이를 '낙원'이라고 소개했다.

현실은 달랐다. 하와이로 건너간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렸다. 당시 노동자들은 등록번호가 있는 '방고(Bangos·번호의 일본말)'라는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다.

하루 10시간의 노동시간을 채우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으며, 이민 초기 월급은 17달러 수준이었다.

1905년 하와이 65개 농장에서 약 5천명의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사탕수수 농장 관리자 '루나'들은 손에 가죽 채찍을 들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선임위원은 "미국 이민법에 계약이민은 금지돼 있었지만, 사실 이들(하와이 이민자)은 이민사업자가 세운 은행에서 뱃삯과 초기 정착비를 빌린 뒤 사탕수수 농장에서 번 돈으로 갚아 나가는 계약이민자였다"며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부족으로 하와이 정부에서도 이를 묵인해 줬다"고 설명했다.

   
▲ 인하공과대 기공식. 1952년 12월 피란지 부산에서 이승만(당시 대통령) 박사는 한인기독학원을 매각한 13만8천500달러 중 5천달러를 한인양로원에 기증하고 나머지로 인천 또는 서울 근처에 대학을 건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하대 총동창회 제공
올 4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조사 분석한 '하와이 이민 1세대 함호용 일가 자료'를 보면 이들의 어려웠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05년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간 함호용(1864~1954년)은 등록번호 '381'을 받고, 마우이섬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

그가 1927년 5월 기록한 농장일지를 보면, 매달 40달러의 수당을 받았는데 지출이 더 많았다. 옷가지, 고기 등을 사려면 47.95 달러가 들어가 매달 적자가 났다.

경제적 어려움은 겪었지만, 하와이 사회에는 빠르게 정착해 갔다. 함호용은 4남6녀를 뒀는데, 출생증명서를 보면 이들의 이름은 '써니' '메리' '클라라' 등 모두 미국식이었다. 이들은 미국에 세금을 내기도 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는 "함호용의 자료를 통해 고된 노동을 감수해 온 이민 1세대의 수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대한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했던 역사적 모습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 '381번' 노동자 함호용의 1941년 2월 월급명세서. 24일간 일한 수당은 38.40달러지만 지출은 47.95달러로 적자임을 알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 미주 한인사회의 뿌리가 되다

이민 1세대들이 하와이에 정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를 세우는 것과 학교를 만드는 일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힘을 기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이들은 믿었다.

한인들을 위한 첫 학교는 1906년 9월 감리교 선교회 와드만 감리사가 앞장서 세운 '한인(남학생)기숙학교'다. 한인 동포 몇 명이 교육회를 결성하고 2천 달러를 기부해 만든 학교다.

1913년 이승만 박사가 한인 동포 교육사업에 참여하면서 큰 변화가 찾아온다. 그는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교명을 '한인중앙학교'로 변경했다.

이승만 박사는 1915년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이주 한인들로부터 3천600 달러를 기부받아 푸우누이 지역에 '한인여학원'을 설립한다.

이 학교는 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감리교로부터 독립했고, 향후 1953년 인하대학교(당시 인하공과대학) 개교의 밑바탕이 된다.

한인 학생들은 당시 하와이 사립학교(유료)에 다니기도 했는데, 이는 한인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사립장학금을 만들어 농장 노동자의 자녀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40년대 들어 한인 동포 대부분이 시내로 진출했고, 이로 인해 한인기독학원은 학생 수 감소로 1947년 폐교됐다.

김도형 선임위원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졸지에 국제 미아가 되어 버린 1세대 이민자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보다 교육열이 뜨거웠다"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라도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게 첫 번째였다.때문에 한인 1.5세대나 2세대 중에서는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이 많이 배출됐다"고 설명했다.

초기 이민사회에는 선교사 홍승하를 주축으로 한 '신민회' 등 정치·사회단체가 있었다.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농장 캠프마다 '동회'도 있었다. 이들 단체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항일단체 성격을 보이기 시작해, 1907년 9월에는 24개 단체와 30개 동회가 모여 '한인합성협회'라는 자치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은 조국 국권 회복과 교육 장려였다.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2월 1일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공립협회와 통합돼 '대한인국민회'가 된다.

   
▲ 한인기독학원.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에 세운 학교로 1915년 '한인여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개교돼 1947년 폐교됐다. 이승만 박사는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팔아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 창립 기금을 만든다. /인하대 총동창회 제공
대한인국민회 창립은 하와이를 비롯한 재미 한인사회의 결집을 상징했다. 이후 노선에 따라 분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채를 발행했다.

여성들도 지금의 적십자사와 같은 '한인 부인구제회' 등 단체를 결성해 만주의 독립군에게 지원금을 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하와이 이민 1세대가 교육과 국권 회복에 매진했다면, 2세대들은 문화 친교 모임을 통해 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힘썼다.

이들은 조선의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만들어진 잡지나 '애국가', '독립선언가' 등이 담긴 가곡집을 갖고 다니며 음악 활동을 하는 등 조국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현재 하와이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이 지금의 미주 한인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여창석 하와이한인관광협회 고문은 "사람은 누구나 뿌리가 있다. 우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을 현재의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을 다진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하와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최고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고의 교육을 시키면서 한인사회를 지켜 냈다"고 말했다.

이어 "한인 최초의 미국 주대법원장인 문대양 전 하와이주 대법원장 등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후손들이 미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도 모두 이민 1세대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여 고문은 "멀리서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무명의 애국지사들'(하와이 이민 1세대)을 대한민국 국민이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글 = 김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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