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용, 손흥민, 김연아 그리고 빅토르 안

원용진

발행일 2014-02-17 제12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810214_388707_4542
▲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그들은 개인의 능력을
존중해 주는 공간과 장치가
없음에 씁쓸해 한다
스타들과 하나되기 위해선
국가와 외국시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스템 마련이 절실


스포츠에 지각변동이 생긴지는 제법 오래됐다. 유럽 정상급 축구 리그를 뛰는 선수들이 그 변동의 선두 주자였다. 그들은 일찌감치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한국을 탈출했다. 성공을 위해 청소년 대표가 되는 대신 유수의 외국 청소년 클럽의 문을 두들겼다. 국가의 관리 하에 차근차근 국가대표까지 이어지는 과정으로부터 이탈해갔다. 외국에서 그들의 명성을 접한 국가가 알아서 그들을 찾도록 했다. 기성용, 손흥민이 그런 과정을 걸으며 성공한 대표적 선수다. 앞으로 국가 대표팀은 그런 선수들로 가득 찰 것으로 예상하는 일도 무리는 아니다.

어디 축구만 그럴까. 스포츠 전반에서 국가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확실하게 인지시켜 준 사건은 빅토르 안의 성공이다. 물론 김연아 선수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그 힌트를 주고 있긴 했다. 국가는 김연아에게 립 서비스만 할 뿐임을 눈썰미 있는 시민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국가의 관리를 벗어나 있으므로 김연아가 더 빛나고 있음을 말을 않을 뿐 눈치 채고 있었다. 그 눈썰미, 눈치를 빅토르 안이 명토박아버렸다. 시민들은 그들에 대한 지지를 통해 국가를 '에헴'만 외쳐대는 뒷방 영감 비슷한 꼴로 만들고 있다.

국가의 뒷문을 통해 능력있는 선수들이 빠져나간 곳은 시장이다. 자신의 능력을 챙겨줄 곳을 시장으로 보았던 것이다. 시장은 능력에 상응하는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시장은 그에 화답했다. 성공한 그들이기에 시장은 국가보다는 유효했다. 그러나 시장은 숨기기에 능해서 성공하지 못한 이들의 뼈를 얼마나 많이 묻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아무나 기다려주지 않는 냉정하고 엄혹한 곳임도 곧잘 숨긴다. 성공 외에는 그 어떤 단어도 용납되지 않지만 자애로운 듯 자신을 꾸민다. 성공한 선수들이 시장을 그렇게 보이게 해준다.

유명 선수들의 변동은 의미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줄여 말하면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의 진자 운동이랄 수 있다. 능력만 있다면 성공하고, 이름을 얻고 자신이 하고픈 것을 맘껏 할 수 있는 공간이 '국가와 시장 사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진자 폭 사이에서 국가의 힘은 약화되고 시장이 더 힘을 쓰고 있음을 최근 스포츠 스타들이 전하고 있다. 시장은 국가를 활용하는 영리한 여유까지 부리고 있다. 월드컵, 올림픽 등 국가 대항전을 활용해 스타들의 상품 가치를 더더욱 높이고 있는 사실에서 시장의 영리함은 빛을 더해간다.

텔레비전으로 스포츠 영역의 지각 변동을 지켜보는 우리는 어떤 인식을 구하게 될까. 이미 빅토르 안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에서 큰 답 하나는 얻고 있다. 국가의 딱딱한 시스템의 비효율성에 대한 인지다.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인 관성 탓에 국가가 더 이상 효율적 시스템으로서 작동하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국가중심적 집단주의는 개인을 보호하기는커녕 망가지게 하는 시스템일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시장의 효율성에 눈길을 빼앗겼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시민들은 자신들이 모두 스타 선수와 같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시장은 합리적인 곳으로 보이지만 이익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합리성만 발휘하는 냉혹한 곳임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나 시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지 못함도 인지하고 있다. 결국 평범한 이들은 국가의 피폐함과 시장의 냉혹함을 알고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가능한 곳이 만만치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손흥민, 기성용, 김연아, 빅토르 안에 연호하지만 그 뒤엔 자신을 배려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나 장치가 없음에 씁쓸해한다. 그래서 밤늦은 가열찬 응원은 깔끔한 뒷맛을 맛보는 시간과 조우하지 못한다. 스타들과 진짜 하나 됨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국가와 시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스템의 마련까지 계속 연기될 수밖에 없다.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원용진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