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쇼오와 이륭양행

김학민

발행일 2014-03-03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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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민 프레시안음식문화학교교장
3·1운동후 상해로 망명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탈출 도운 쇼오가 없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것
그가 운영했던 '이륭양행'
유적지로 보존돼야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에 일어난 3·1운동은 우리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세계만방에 떨친 일대 사건이었다. 3·1운동은 처음부터 비폭력의 행동강령을 내세웠기 때문에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결국 많은 희생자를 내고 일단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운동에 한계를 절감한 민족주의자들은 그 해 가을부터 해외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대거 조선을 탈출한다.

군사를 모으고 힘을 길러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염두에 둔 사람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 일대로 모여들었고, 다른 일군의 운동가들은 구미 열강의 조계가 산재한 상해에서 임시정부 설립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북만주는 압록, 두만의 상류 얕은 물길을 건너면 비교적 쉽게 갈 수 있었지만, 안동(지금의 단동)을 거쳐 상해로 향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상해로 가는 방법은,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서 배편으로 건너는 것이 유일한 경로였다. 3·1운동이 일어난 그 해 가을 백범 김구 선생도 이 경로로 조국을 탈출, 15명의 동지들과 함께 상해로 망명한다. 이때의 김구 일행의 상해 탈출은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나는 중국인의 인력거를 불러 타고 바로 큰 다리 위를 지나서 안동현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하고 좁쌀장수라 표방하고, 7일을 경과하여 이륭양행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황해안을 경과할 시에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정선을 요구하나 영국인 함장은 들은 체도 아니 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 4일 후에 무사히 상해 황포강 나루에 닻을 내렸다. 배에 함께 탄 동지는 도합 15명이었다."

일본 경비선의 정선 명령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배를 몰아 김구 선생을 무사히 상해로 탈출시켰던 '영국인 함장'은 바로 3·1운동 이후 우리 독립운동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아일랜드인 조지 L. 쇼오이다. 영국계 태고선박회사의 안동현 대리점인 이륭양행을 경영하고 있었던 그는, 1919년 5월 상해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기관으로 교통국을 설립하자, 자진하여 이륭양행 2층에 교통국 안동현사무소를 설치토록 하였다.

이후 국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쇼오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으며, 독립운동자금을 구하러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하는 사람들도 쇼오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쇼오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도움을 넘어 스스로 대일본 테러활동에도 적극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는 이에 대한 김산의 진술이 들어 있다.

"의열단은 여덟 개의 전략적 건축물을 파괴하고 일본인 관헌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비밀리에 2백 개의 폭탄을 한국에 들여왔다. 폭탄은 안동에 있는 영국회사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 회사 소유의 기선에 실어 상해에서 보냈다. 안동 회사의 지배인은 아일랜드인이었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그를 '샤오'라고 불렀다. ---샤오 자신이 상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서 스스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쇼오를 신의주로 유인, 1920년 7월 11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1920년 8월 6일 경성고등법원은 쇼오 사건의 연루자 24명과 함께 쇼오를 내란 피고사건으로 기소하였지만, 영국과 일본의 협상 끝에 그 해 11월 4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쇼오는 안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이륭양행을 운영할 수 없었고, 그 이후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지난 해 추석 즈음, 단동에 거주하는 후배의 초청으로 단동을 다녀왔다. 이를 기회 삼아 물어물어 조지 쇼오의 이륭양행 자리를 찾아가 보니 옛 건물은 아직 있었지만, '홍윤(鴻潤)'이라는 부동산 회사 소유로 곧 재개발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남북관계가 좋아져 단동 경기가 살아나면 그 자리에 대규모 오피스 빌딩을 짓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이렇게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요 유적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판에, 엊그제 3·1절 대낮에 일부 보수단체들이 일제 통치를 긍정적으로 기술한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를 광화문에서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보급하는 운동을 벌였다.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서란다.

/김학민 프레시안음식문화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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