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원을 꿈꾸다·3]'유물의 보고' 연천

대학자 미수 허목의 정신
지역문화 비옥하게 하다

김신태 기자

발행일 2014-04-30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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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509호 '미수 허목 초상화'. /문화재청 홈페이지
'한반도 중앙' 예로부터 전략요충지 삼국시대부터 절벽 성 다수 축조
구석기 연구학설 뒤집은 주먹도끼 발견으로 전곡리 세계적 유적 되다

송시열과의 '예송논쟁' 유명 근기실학 사상가이자 예술가
말년 고향서 저술활동… 집과 서원터 복원·콘텐츠 개발중


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있어 비옥한 토지가 발달한 연천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앙에 위치, 육로와 수로가 발달한 교통의 요지로서 선사시대부터 한국 고인류의 발상지와 교두보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경지역이었던 만큼 각 국이 영토전쟁을 벌였던 치열한 다툼의 현장이었다. 고려 수도인 개경과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으로부터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고 풍수적으로 온화한 지세(地勢)로 수많은 인걸을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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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로고루성.
■성

#성(城)


삼국이 각축을 벌이며 영토전쟁을 벌이던 시기, 고구려는 한반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연천지역은 초기 백제의 영역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그리고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형성된 자연절벽(현무암 주상절리) 등 특수한 자연조건을 이용해 성들이 축조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고구려 시기에 축조된 이 성들을 계속 보수, 사용했다.

호로고루(瓠蘆古壘·사적 제467호)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원당리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수직단애를 이루는 긴 삼각형 대지위에 조성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이곳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의 상류에 위치해 있어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위치한다.

평양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 코스는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문산 방면으로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15㎞ 우회해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차례 전투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의 전차부대 등의 도하지점이 됐던 전략적 요충지다.

은대리성(隱垈里城·사적 제469호)은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역시 강안평지성이다. 유적을 감싸고 남서향하는 한탄강은 곧 임진강에 합류하고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돼 왔던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도 주변을 지나고 있다. 수로와 육로 어느쪽이든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해 전략적 요충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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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포성.
당포성(堂浦城·사적 제468호)은 당포나루로 흘러들어오는 당개 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약 13m 높이의 삼각형 절벽위 대지의 동쪽 입구를 가로막아 쌓은 성곽이다. 강안평지성으로 입지조건과 평면형태는 호로고루 및 은대리성과 매우 유사하다.

비지정문화재인 대전리산성(大田里山城)은 대전리와 장탄리의 경계를 이루는 성재산(해발 137.5m)에 축조돼 있다. 지난해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첫 발굴조사를 실시한 곳이다.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 위치를 모를 정도로 아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화재연구원은 조사결과 성벽 몸체가 중심성벽을 중심으로 바깥쪽 성벽에 다시 덧대어 쌓은 것으로 확인했다. 연구원은 성벽 몸체 축성기법으로 미뤄 대전리산성을 처음 만든 시기와 주체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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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철성.
역시 비지정문화재인 수철성(水鐵城)은 전곡읍 양원리 해발 397m봉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수철성 앞 도로는 양주지역에서 적성이나 연천방면으로 가는 주요한 교통로여서 이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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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곡리 구석기 유물 발굴터 모형.
■터

#선사유적


연천 전곡리유적(사적 제268호)은 한탄강변 해발 61m정도의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1978년 미군병사 그렉보웬이 우연히 채집한 4점의 석기를 서울대 고(故) 김원용 교수에게 전달해 알려지게 됐다. 이 석기들은 아슐리안형 석기(주먹도끼)로 밝혀져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모비우스학설을 바꾸게 된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이 됐다.

모비우스학설이란 세계 구석기 문화를 유럽·아프리카는 아슐리안석기문화, 동아시아는 찍개문화 등으로 나눴던 것이었지만 전곡리 유적 발견으로 구석기 연구의 근간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됐다. 2001년까지 11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약 4천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됐다.

현재 전곡리 유적내에는 발굴조사를 토대로 한 토층전시관과 발굴피트, 구석기시대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구석기 생활상 복원 존'이 있다. 2011년 4월 개관한 전곡 선사박물관은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전곡리유적에서는 매년 5월 초 구석기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올해는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잠정 연기된 상태다.

연천 고인돌공원(향토문화재 제7호)은 전곡에서 연천으로 가는 3번 국도상에서 연천읍 방향으로 가는 갈림길 바로 오른편 구릉상에 위치해 있다.

고인돌 공원은 원상태 보존이 어려운 연천지역의 고인돌을 조사한 후 효율적으로 관리·보존하고자 이곳으로 이전·복원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현재 이곳에는 16기의 고인돌이 이전·복원돼 있으며 이중 2기는 발견 당시 위치에 원형 그대로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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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수 허목 선생 묘역석.
■묘

#미수 허목 묘역


경기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돼 있는 미수 허목 묘역은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민통선내에 위치해 있다. 안월천을 건너는 강서5교를 지나 북쪽으로 300m정도 직진하면 좌측 능선 해발 100m에 위치해 있다. 선조인 허자의 묘와 약 10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미수 허목의 묘는 동남향 나지막한 구릉에 6기의 묘 가운데 제일 아래에 위치해 있다. 그의 묘는 부인 전주이씨와 합장묘다.

최근 미수 허목 묘역을 찾았을 때, 마침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재돌봄사업단 관계자들이 묘에 떼를 입히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묘역이 인적이 드문 민통선내에 있다보니 야생 멧돼지에의해 묘역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문화재돌봄사업단 관계자는 "멧돼지가 묘역 이곳저곳을 파헤쳐 놓았다"며 "돌봄사업 대상지가 여러곳이지만 미수 허목 묘역의 보수가 급해 우선 보수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최근 문화답사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미수 허목 묘역을 찾고 있는만큼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수(眉수) 허목(許穆·1595~1682)은 연천군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아이콘이다. 조선 후기 남인의 한 일파인 청남의 영수로, 당대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맞섰던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예송논쟁은 임금의 죽음에 그 계모가 상복(喪服)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조선 제17대 효종이 승하하자 그의 계모이던 조대비가 어떤 복(服)을 입을 것인가로 논쟁이 벌어진다.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禮論)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장자인 경우 '3년상'을, 차자일때는 '1년상'을 하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효종이 임금이지만 인조의 둘째아들이었으므로 조대비는 종법(宗法)에 따라 1년상을 해야 했다. 그래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계열은 1년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계열의 허목, 윤선도 등은 둘째 아들일지라도 일단 왕위에 오르면 장자로 봐야 하며 조대비는 3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논쟁은 결국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장자와 차자 구분없이 1년복을 입게 한다'는 규정에 의거해 결말지어지고 허목은 외직인 삼척부사로 밀려나게 된다.

허목은 이황의 퇴계학과 서경덕의 화담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근기실학이 태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사상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예술가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독특한 전서체는 그 형태와 아름다움을 동양제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강원 삼척의 '척주 동해비'를 들 수 있다.

묘역에서 500m 거리에는 그가 생전에 살던 집인 은거당(恩居堂)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은거당에는 10가지의 늘푸른나무가 있다고 해 십청원이라 불린 정원과 기이한 암석을 모은 괴석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이후 현재는 그 터(연천군 향토문화재 제14호)만 남아있으며 허련이 그린 심청원에서 그 옛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은거당은 허목이 말년에 고향인 연천에 머물면서 주로 저술활동을 했던 곳이다. 허목이 84세가 되던 해인 1678년(숙종 4)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를 예우하기 위해 특별히 왕명에 의해 건립된 7칸 규모의 가옥이다. 현재 은거당터에는 '은거당 옛터'라 음각한 커다란 안내비가 조성돼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은 현재 연천군과 함께 미수 허목의 정비복원사업에 나서고 있다. 그의 집터인 은거당과 그를 배향하던 미강서원터 발굴·정비·복원 등이다. 미수 허목의 정신과 학문의 계승·현양사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이를 연천군의 문화자산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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