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원을 꿈꾸다·6]용인과 안성의 고택

낮은 지붕 아래, 수백년 세월이 산다

기자명 기자

발행일 2014-05-21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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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 이주국 장군 고택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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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국장군 생가 영조29년 건축 조선 살림집 특징 잘 간직
목은 이색 후예 이자선생 옛집 '경기지역 주택 표본'
인물 배출한 오정방고택 현재 오씨종부 거주
문화재돌봄사업단, 수리·주변 상시관리

용인이주국장군고택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은 오백 이주국(李柱國·1721~1798)장군의 생가로 전해지는 가옥이다.

이주국 장군은 조선 후기 무신이며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의 후손으로 1721년(경종1) 이곳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에서 태어났다. 영조 16년(1740)에 벼슬길에 올라 형조판서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 전해지는 관련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터 등이 전한다. 묘역은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이 가옥의 건축연대는 안채의 망와(望瓦·용마루의 끝에 끼어 그 마구리를 장식하는 암막새)에 기록된 명문을 참조, '건륭18년계유일조작(건륭)'이라고 돼 있어 1753년(영조 29)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안채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장여 측면의 상량문을 보면 1990년에 중수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대문안으로 들어서면 사랑마당과 안마당이 연속돼 있으나 원래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구획하는 담장과 중문 채가 있어서 각각의 공간이 분리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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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이주국장군고택의 대문 및 행랑채.
전체적으로 가옥의 입지와 채 구성, 공간 분할, 조경 수법 등에서 조선시대 살림집의 고전적인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고택에는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택에 거주하는 집주인은 이주국 장군의 후손은 아니다. 몇차례 매매를 통해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기문화재단 부설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재 돌봄사업단이 이 고택을 상시관리하고 있다. 최근 이 고택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문화재 돌봄 사업단 관계자들이 고택 앞마당의 쓰레기와 나무들을 정리하고 화단에 꽃씨를 뿌리는 등 돌봄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문화재 돌봄사업단 관계자는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어 고택 안쪽은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건물 외벽 등이 부서지거나 하면 바로 복구하는 등 항상 깨끗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돌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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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전음애이자고택의 기둥과 초석.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위치한 용인전음애이자고택(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은 조선 중종때 덕행 높은 이자(李자·1480~1533)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옛집이다.

용인민속촌에서 지곡동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동북향으로 앉아있는 이자 고택은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얼마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

이자 선생의 본관은 한산(寒疝)이고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다. 고려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 유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의 후예다. 1501년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감찰을 지내고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곧 이조좌랑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으로 사직했다. 그후 1518년 종계변무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 겸 경연관에 올랐다. 기묘사화를 당해 파직되자 용인, 음성, 충주 등지에 퇴거해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의란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돼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해 이곳을 제사공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분되는 특이한 평면구조를 보이는데 인근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이해룡 고가 등과 연관성을 보이는 조선시대 경기지역 중류주택의 일면을 보여준다.

고택 앞마당에는 우물이 위치해 있다. 문화재 돌봄사업단이 최근 부엌의 부서졌던 부분들을 새롭게 정리했다. 고택 좌측에는 근래에 건립된 '효문의공부조지묘'란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또 고택 바로 옆에는 이자 선생을 기리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고택에서 동북쪽으로 도로를 건너 지곡동 달래울 신갈승마클럽 뒷산 줄기 능선에 이자 선생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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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의 사당.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는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이 자리잡고 있다. 1510년(중종5)에 처음 건립된 이래 정무공 오정방(吳定邦·1588~1634), 천파공 오상, 충정공 오두인(1624~1689)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씨 명현들을 배출한 유서깊은 곳으로 내려온다.

오정방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영언(英彦), 호는 퇴전당(退全堂)이다. 호군을 지낸 오수천의 아들이며 수군우후를 지낸 숙부 오수억에게 입양됐다.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장원급제하자 이이로부터 영재란 칭찬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부도사로 영흥지방에서 의병 수천명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하다가 삭직당했다.

인조 1년(1623년) 인조반정 후 포도대장에 등용됐으며 경상좌도 병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왕을 따라 공주까지 호종했다.

특히 충정공은 이 집에서 성장해 나라에 크게 공훈을 떨친 바 있어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 당초에는 덕봉리 252에 세워졌지만 1650년(효종1)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고 전해진다. 현존하는 건물은 문간채, 안채 및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돼 있으며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과 일곽을 형성하고 사당은 사랑채 뒤쪽에 조금 비켜서 별도로 세워졌다.

현재 안채 부분만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사랑채 부분은 주변에 아무런 경계가 없이 외부에 노출 돼 있다. 원래 외곽에 별도의 행랑채나 문간채, 담 등이 있어 외부와 경계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고택에는 해주 오씨 종부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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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방 고택과 길 하나 사이를 두고 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 재실이 위치해 있다. 덕봉리 선비마을은 해주 오씨 집성마을로, 종중은 50여억원의 종중재산을 들여 재실을 신축했다. 제례실, 전시실, 식당, 교육장, 정자 등을 갖추고 있다. 선비마을은 지난 2007년 문화관광부에서 추진하는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에 선정된 마을이다.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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