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9]이규원 '해방공장'

1945년 '팔월의 해방' 부평에선

억압의 상징 기계소리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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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당시 '한 달 보름간의 이야기'

日관리자-노동자 사건 상세 묘사

조병창은 근대도시 부평의 기원

캠프마켓 건물·미쓰비시 사택촌 등

문화유산 보존 방법 과제로 남아

인구 55만명의 인천 부평구. 그 한복판 아파트 밀집 지역에 미군 기지 캠프 마켓(Camp Market)이 있다. 이 터에 군사기지가 들어선 것은 75년 전인 1939년에 완공된 일본 육군 조병창이 시작이다. 

조병창에 납품하는 기계·금속·자동차·방직 공장이 생겼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일제의 식량수탈 정책으로 땅을 잃고 유랑하는 농민, 전쟁터에 강제로 징용되는 것을 피하려는 젊은이들, 무기와 그 기술을 빼내려는 독립운동가들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지금의 산곡동, 청천동, 부평동 일대에 정착했다. 조병창을 중심으로 철로가 생기고 도로가 뚫렸다. 부평이라고 하면 조병창을 떠올릴 정도였다. 

당시 부평은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을 뒷받침하는 대규모 군산복합단지 기능을 감내해야 했다. 근대 도시로서 부평의 출발점은 '군사 도시'였고, 그 역사는 캠프 마켓으로 이어져 현재진행형이다.

1945년 '팔월의 해방'은 끝이 언제인지도 모른 채 끼익끼익대며 숨가쁘게 돌아가던 부평 공장의 기계 소리를 멈추게 했다. 조선 반도에서 일제의 패망을 이토록 실감나게 느낀 곳이 또 있을까. 

소설가 이규원(1911~?)은 부평의 한 군수공장을 무대로 소설 '해방공장(解放工場)'을 완성했다. 해방 당일인 8월 15일부터 10월 1일까지 한 달 보름간의 이야기다. 

일본인 관리자와 조선 노동자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사실적으로 풀어낸 기록 문학이다. 소설 속 인물의 목소리가 생생하고 풍경 묘사가 사실(史實)과 겹친다. 

조병창에 대한 사료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이규원의 단편 '해방공장'은 역사에 괄호로 남겨진, 부평의 해방공간을 입체적으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비록 작가가 '메시지'에 치중한 나머지 문학성을 담보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해방공장'은 인천이란 도시 입장에서 본다면 분명코 기념비적이다.

# "오늘부터 당신 명령은 통하지 않소"

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 십오일, 정오. 서울과 인천을 이어놓은 식민도로(植民道路)-말하기를 산업도로를 앞에 끼고 부평평야에 풍덩 주저앉은 이 군수공장은 거무하에 들려올 역사적 통곡도 모르고 압박과 착취의 고역을 계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식민도로는 경인로(46번 국도)를 가리킨다. 이 도로를 끼고 부평평야에 주저앉았다는 표현으로 미뤄 보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장은 현재의 부평공원 자리에 있었던 미쓰비시(三菱)제강일 것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1942년 히로나카(弘中)상공 부평공장을 인수한 뒤 미쓰비시제강을 만들었다. 히로나카상공은 1939년에 건설된 회사로, 당시 이 공장과 부평역을 연결하는 철도인입선이 생겼다.

해방 당일 조회시간. 이 공장 포탄직장(砲彈職場)의 한 선반공은 불량품을 냈다는 죄로 헌병대에 끌려갔다. 그런데 곧 "천황 폐하가 울면서 항복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느 틈에 공장 간부들은 '중대 방송'을 들으러 빠져나갔다 돌아왔다. 호시노 공장장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는 줄 알았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따라 오란 줄 알았더니"라며 탄식했다.

기계가 멈췄다. 허공에 회색 가루만 자욱했다. 공장장은 배전실 스위치를 올리라 지시했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용해공(溶解工) 김용갑의 시커먼 손이 공장장 손목을 잡는다.

당신 맘대로 기곌 돌릴 수 없소. 오늘부터 이 공장에서 당신 명령은 통하지 않소. 명령할 권리는 우리들에게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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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도시로서 인천 부평의 출발점은 75년 전인 1939년에 완공된 일본 육군 조병창을 시작으로 '군사 도시'였고, 그 역사는 캠프 마켓으로 이어져 현재진행형이다. 인구 55만 명의 인천 부평구. 아파트 밀집 지역 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 기지 부평 캠프 마켓(Camp Market). /임순석기자

# 미완의 기획, '팔월공장'

'해방공장' 속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구성해 공장 인수를 준비했다. 현장관리, 반제품 재료 관리, 경리 업무 책임자를 정했다. 자위대를 운영해 공장 파괴를 막았다. 공장을 경영하던 야마니시 사장, 노야끼 전무, 호시노 공장장이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노동자들이 이들을 찾으러 사택으로 향했다.

옹기종기 닭집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공원 사택 앞을 지났다. 바라크 건물로 칠팔채 한데 붙어 있는 줄기집들인데 퇴색한 채 수리를 하지 않아 양철은 삭아 내려앉고 벽은 허물어졌다. 앞가슴 뼈가 앙상하고 배때기만 불룩한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뛰놀았고 (…중략…) 조금 언덕진 남양 쪽은 일본인 사원들 사택이다. 골목이 넓고 줄렁집이 아닌 데다가 상나무, 사철나무 등을 심어 제법 주택의 면모를 이룩했다.

지금도 부평공원에서 남측 철길을 건너면 옛 미쓰비시 사택촌이 남아 있다. 당시 '나까마치'라고 불렸다는 길을 사이에 두고 일본식 기와가 얹힌 단층 목조 주택이 즐비하다. 이른바 줄사택으로, 한 줄에 7~8호씩 거주했다고 한다.

청천동 영아다방사거리 부근에도 사택촌이 남아 있는데, 검정사택으로 불렸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양색시들이 많이 거주했다. 부평 산곡동에 조선인 공장 노동자들에게 공급한 임대주택인 영단주택이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인 직원 사택의 아이들은 헐벗어 뼈가 앙상한데, 사장 아내와 딸들은 포동포동 살이 쪘다는 묘사가 대조적이다. 노동자들은 사장 집에서 직원용으로 나온 배급쌀을 발견하고 눈이 뒤집힌다. 다다미 아래 숨어 있는 사장, 전무, 공장장을 끌어냈다. 공장해산금, 월동준비금 등의 명목으로 300만원을 요구했다. 호시노 공장장은 "물론 여긴 일본도 아니다. 또 조선도 아니다. 여긴 연합군 점령지가 될 것이고 그동안까지의 치안권은 일본군에게 있다"며 며칠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얘기가 안 통하자 노동자들은 이들을 공장으로 끌고 가 방공호에 감금했고, 결국 요구액의 절반인 150만원을 받기로 약정을 맺는다.

'해방공장'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의 '발전적 해체'를 거쳐 공장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공장 이름을 '팔월공장'으로 바꾸고 공장 가동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소설이 끝을 맺는다.

이 때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은 '미완의 기획'에 그쳤다. 우선 노동자들은 원료, 연료, 자본 등이 부족했다. 대중일보는 '인천 130개 공장 중에 근근 조업 불과 사할'(1945년 11월 26일자)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인천 130개 공장 중 조업 공장수는 48개(부평은 10개 중 2개)였다고 기록했다. 또 미군정은 군정령 2호, 33호를 통해 일본인 소유 재산 매매를 금지했고, 그 재산(적산)을 군정청에 귀속했다.

# 조병창과 캠프마켓, 그리고 부평

'해방공장' 노동자들이 일본인 경영진에게 넘겨받은 건 "현금 없는 장부와 중요재료빠진 명세표와 그밖에 수금능력이 없는 채무권리서 등" 이었다. 당시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의 산업 시설과 재산 파괴·반출 행위는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였다. 

항복했는데도 일본인들은 공장은 물론 학교와 주택가에 폭발물을 설치해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할 정도였다. 왕실 기록에서부터 심지어는 기상 통계까지 일본인들은 폐기·반출하려 했다. 

실질 임금 하락, 실업률 상승으로 고통받는 당시 민중에게 필요한 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일자리였다. 이 같은 이유에서 공장 노동자들은 자위대를 구성해 공장 설비 파괴를 막으려 했다.

'해방공장'은 1948년 9월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시지부가 발행하던 '우리문학 제10호'에 발표됐다. 편집자는 잡지 끄트머리 여록(餘錄)에서 해방공장이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후속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또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한다"고 적었다. 

해방공장의 실제 모델로 추정되는 미쓰비시중공업은 국군이 차량 기지로 사용하다가 철수했고 그 자리는 2002년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조병창을 이어 받은 캠프 마켓은 2016년에나 반환될 예정이다.

김현석 부평역사박물관 학술조사전문위원은 "조병창은 근대 도시 부평의 기원이고, 조병창이 만들어지면서 부평이 새롭게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며 "현 캠프마켓의 조병창 건물과 이 일대 사택, 영단주택 등을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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