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6]독립국가에서 자치구된 티베트

청나라지원 공짜라고 착각
정치간섭으로 결국은 복속
경인일보·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 공동주최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4-05-29 제18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861579_422457_1635
▲ 이준갑 인하대 사학과 교수가 27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티베트와 청조의 동상이몽'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인하대한국학연구소 제공
861579_422456_1635
외부적 침략 막아주는 대신
내정 참여 합법적 권한 획득
달라이라마 저항에도 역부족


티베트가 독립된 나라에서 중국의 일개 자치구로 전락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준갑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티베트 사회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결탁해 내부적으로 절대 소수(지배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체제로 고착됐다"며 "이와 더불어 티베트의 지배층이 장기간에 걸친 청조의 지원을 공짜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티베트가 중국에 종속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7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티베트와 청조의 동상이몽'이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중국정부는 1959년 ▲농노주가 독점하는 토지제도 폐지 ▲정교합일제도 철폐 ▲주민주체 정권설립 등 3가지 명분을 내세워 '민주개혁'이란 이름의 티베트 점령·통치를 단행한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민주개혁 이전의 티베트 사회는 인구의 95%에 달하는 농노·노예가 5%에 불과한 농노주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사는 부정과 불의에 가득찬 사회였다.

티베트의 농노제는 10~13세기 무렵부터 보편화됐으며, 봉건정부와 귀족, 사원(상류층 승려)이 지배하는 구조였다. 여기에 한 사람이 정치와 종교(불교)를 통치하는 나라였고, 법률은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했다.
청조(1644~1911) 당시 '조공관계'로 대변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티베트와 청은 독특한 국제관계를 유지했다.

승려와 시주 사이에 형성되는 '공시(供施)관계'가 국가 사이에 형성됐는데, 티베트불교가 청 황실의 복을 빌어주거나 평안을 기원하는 대신 청은 달라이라마에게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고 외침을 방어해줬다.

티베트에 대한 청의 내정간섭은 바로 이 공시관계에서 비롯됐다. 청은 1717년 준가르부의 티베트 침략을 막아주고, 1727년 내분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주장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한다.

1750년 주장대신이 티베트의 유력자와 갈등을 빚으면서 피살됐고, 이듬해 청은 서장선후장정(西藏善後章程) 13조를 강요하며 군사를 거느리고 티베트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획득했다.

청은 건륭 53년(1788), 건륭 56년(1791) 2차례에 걸친 네팔의 티베트 침공에 대한 전쟁비용으로 한 해 세수 4분의1에 달하는 금 1천52만냥을 사용했다. 이를 계기로 주장대신의 입지도 약해졌다.

이에 건륭 58년(1793) 청은 '티베트 고위관료를 임명할 때는 달라이라마와 주장대신이 협의할 것', '대외업무는 주장대신의 비준을 받아서 처리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된 장내선후장정(藏內善後章程) 29조를 만들어 티베트의 정치적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 교수는 "티베트와 청조의 공시관계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차원으로 변질됐다"며 "달라이라마는 청조의 정치적·군사적 개입에 저항했지만, 현실적인 역학관계가 지극히 열세였기 때문에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청조와 티베트는 공시관계라는 '같은 침상'에 있었지만, 청조는 시주의 대가로서 티베트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차근차근 시행했고, 티베트는 청조의 시주가 아무런 대가가 없는 공짜라고 착하는 서로 다른 생각, 즉 '동상이몽'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다음 7강은 다음달 10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강사로 나와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북아 영토문제'란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

김민재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