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원을 꿈꾸다·7]여주 고달사지와 신륵사

천년고찰 화려한 과거에서 보물을 찾다

김신태 기자

발행일 2014-06-11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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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석조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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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고달산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 신라 경덕왕때 창건 18세기말 폐사 추정
고려 왕실 적극적 후원 사세 떨쳐… 터 훼손되자 발굴 조사·보존 작업
원종대사혜진탑·석불대좌 등 웅장함 표현한 석조유물 사찰 위상 짐작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사적 제382호)는 해발 400~500m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서북쪽 고달산(혜목산, 현지명은 우두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다. 지난 2005년 편찬된 '여주군사(驪州郡史)'에 따르면 고달사의 정확한 창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됐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달사는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인 도봉원(道峰院, 도봉산 영국사), 희양원(曦陽院, 경북 문경 봉암사), 고달원(高達院)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어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특히 고달사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원종대사 찬유는 고려초 국사의 예우를 받으며 활약한 승려로, 고려 광종때의 불교 교단 정비와 사상의 통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법안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달사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원종대사 사후에도 광종이 특별히 명을 내려 도봉원·희양원과 함께 고달사를 삼부동선원(三不動禪院)으로 삼고 977년(고려 경종2)에 원종대사혜진탑을 건립하는 등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이 시기에 크게 사세를 떨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가 언제 폐사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799년(정조 23)에 쓰인 '범우고'에 비로소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돼 있어 적어도 18세기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달사지는 관련학계에서 일찍부터 그 중요성을 인식, 199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절터에 민가들이 들어서 마을이 형성돼 있었고 일부는 경작지로 이용되면서 절터의 파괴가 진행됐다. 이에 경기도와 여주군은 사역의 정비와 보존 필요성을 인식, 1998년 고달사지의 정비 및 보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역 전체에 대한 시굴 및 발굴조사를 경기도박물관에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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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그리고 이후 주변 민가를 매입, 철거한 후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현 경기문화재연구원)에 발굴조사를 의뢰했으며 10세기말 이후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15동의 건물지를 확인했고 2006년까지 6차 발굴조사를 완료했다.

고달사지에는 현재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비롯해 보물 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7호인 원종대사혜진탑, 보물 8호인 고달사지 석불대좌 등 고려시대의 웅장한 기운을 표현한 여러 석조물들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문화재들은 그 규모와 조각기법 등 당대 최고의 기술로 표현된 것으로 당시 고려시대 고달사의 위상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보물 제282호인 쌍사자석등은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다.

이중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어졌으며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종대사혜진탑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여주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비신(碑身)을 복제, 원종대사 혜진탑비를 오는 8월까지 복원키로 했다. 현재 고달사지 위쪽에는 임시도량인 '고달사(대한불교 조계종)'가 위치해 있으며 몇몇 스님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다. 그리고 고달사는 지난 2009년부터 고달사의 복원과 재도약, 그리고 원종국사를 조명하는 다례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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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강월헌과 삼층석탑.
■신륵사

신라 원효대사 창건설… 봉미산 남쪽기슭 위치 남한강 흘러 경관 수려
고려말 나옹 선사 입적으로 '유명세' 세종대왕릉 원찰돼 대대적 중수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여주 신륵사(神勒寺)는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여주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절 앞으로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창건 시기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없는 상황이다.

신륵(神勒)이란 사찰 이름은 신기한 미륵(혹은 나옹선사, 혹은 인당대사)이 신기한 굴레(勒)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시기는 고려말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온(1409~1481)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7 여주목 불우조(佛宇條)에서 "옛날 현릉의 왕사 나옹과 목은선생 두 사람이 서로 이어와서(신륵사에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드디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나옹과 신륵사는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1376년(고려 우왕2)에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했다는 사실이다.

나옹선사 입적 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각(禪覺)이란 시호를 내리고 이색에게 선각탑명(禪覺塔銘)을 짓게 했다. 그리고 입적 3개월 후인 1376년 8월 15일에 나옹의 제자들이 중심이 돼 신륵사 북쪽 언덕에 나옹의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석종형의 부도를 세웠으며 동시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뤄졌다.

조선시대들어 신륵사는 영릉(英陵)의 원찰이 되면서 또 한번 중창의 기회를 맞게 된다.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군으로 천장한 것은 예종 원년(1469)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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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다층전탑.
곧이어 영릉의 원찰을 짓는 일이 거론되다가 한명회 등의 건의에 따라 가까이에 있는 신륵사를 원찰로 해 중수하게 됐다. 신륵사의 중수불사가 끝난 다음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신륵사의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게 하고 세종대왕릉의 원찰로 삼았다.

조선중기에는 임진·정유란의 병화로 피폐된 신륵사를 1671년(현종 12)과 1702년(숙종 28)에 여러 스님이 다시 중수했다. 그리고 1726년(영조2)에 동대(東臺)에 있는 전탑을 중수하고 중수비를 세웠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제225호), 다층전탑(제226호), 보제존자석종(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제29호), 대장각기비(제230호), 보제존자석등(제231호), 조사당(보물 제180호)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제128호), 팔각원당형석조부도(제195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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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나옹 진영 봉안을 목적으로 세워진 조사당은 현재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현재 보수정비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고 있다.

/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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