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원을 꿈꾸다·8]다산 정약용과 번암 채제공

인생 마지막날까지 민생을 생각하다

김신태 기자

발행일 2014-06-18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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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과 재현된 배다리 모형. 배다리는 정조의 수원 행차 때 다산이 노량진에 설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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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 필요한 학문' 실학 정립 대학자
남양주 마재마을서 어린시절·말년 보내

생가 여유당서 형제들과 매일 경전 공부
1925년 홍수로 떠내려가 1970년대 복원

마을 중심부엔 다산과 부인 합장묘역
조선초 창건 추정되는 수종사 자주 들러


茶山

실학(實學)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말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으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말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고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한 여러 개혁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농업 생산력과 새로운 상업이 발전하게 됐다.

당시 학문은 백성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지만 실학은 생활에 필요한 학문이어서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이런 실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그리고 번암 채제공은 다산 정약용의 정치적 스승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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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초상화. 작자 미상.개인 소장.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나주(羅州)고 호는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다산(茶山) 등이며 당호는 여유(與猶)다.

정약용은 17~18세기 실학(實學)을 종합한 조선 후기 대학자로 그의 생가와 묘가 있는 곳이 남양주 마재(馬峴)다. 마재마을은 그가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고향으로, 남양주 두물머리의 쇠내(苕川: 마재라고도 한다)다.

마재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마을 앞으로는 한강이 휘감아 흘러가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마을의 동쪽 한강을 '두물머리(斗江)'라고도 한다. 양수리(兩水里)란 명칭도 양쪽물이 합쳐진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으로 두물머리의 다른 이름이다.

마재마을과 강 건너 보이는 분원(分院·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사이의 한강은 초천·초내·쇠내·소천·소내·우천(牛川) 등으로 불렸으며 강변에 우거진 갈대숲과 강물이 어우러져 생긴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는 15세에 과거시험을 본 후 부인 홍혜원과 결혼하면서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두물머리를 배경으로 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와 함께 고향인 마재마을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운길산(雲吉山), 수종사(水鐘寺), 천진암(天眞菴)도 그가 마재마을 주변에서 자주 찾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다산은 1784년 서학(西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設)을 지어 올려 축조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했다.

1801년(순조1)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천주교도를 박해했던 신유교난(辛酉敎難)때 포항 부근의 장기에 유배된 뒤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돼 전남 강진으로 이배됐다.

황사영 백서사건은 천주교도 황사영이 신유박해로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의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향을 가자 교회를 재건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냈다가 이 사실이 발각돼 일당이 모두 체포돼 처형된 사건이다. 이 백서는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돼 있다.

그 곳에서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 폐기 등을 주장했다.

이런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박지원을 대표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다.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1800년(정조 24) 가을 유배에서 풀려나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약전, 약종 등 형제들과 매일 경전(經典)을 공부하며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뜻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여유당은 다산의 5대조부터 자리를 잡은 곳으로, 다산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이후 다산 생가는 1925년 여름에 큰 홍수로 떠내려가 1970년대 복원됐다. 여유당은 본래 다산유적지 입구 주차장 부근으로 추정되며 복원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다산은 환갑이 되던 1822년(순조 22)에 그동안 자신의 평생을 되돌아보고 다시 출발한다는 뜻에서 집 뒤편 유산(酉山)에 자신이 묻힐 곳을 정하고 그 곳에 묻을 묘지명도 직접 지어 뒀다. 이때부터 '사암(俟菴)'이란 호를 사용했는데 후세를 기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의 묘역은 마재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됐다. 묘는 그의 부인(풍산 홍씨)과의 합장묘다. 여유당 인근에는 2009년 개관한 실학박물관이 있다.

실학박물관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오늘날 계승하기 위해 실학의 형성과 전개, 천문과 지리 등 실학사상 전반을 전시하고 있다.

또 실학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 조사 연구사업, 실학자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수집·보존·관리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또 1990년에 개관한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인 간찰(簡札) 및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돼 있다.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를 이용해 정조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갈 때의 모습을 그린 능행도와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분야별로 기록해 놓았다.

인근에 위치한 수종사(水鐘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다. 수종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불우(佛宇)조에도 연혁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1939년 석조부도를 중수하면서 1439년(세종 21)에 조성된 부도가 발견돼 최소한 조선 초기에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수종사는 조선 초기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종사란 이름을 세조가 지어준 것으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수종사는 마재에 살던 정약용 형제들의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곳이었다.

특히 수종사는 세조로부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 기간동안 시인 묵객뿐만 아니라 정치 일선에 있었던 정치가에서부터 서거정, 김종직, 김집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빈번한 출입처였다.

고종때 조정의 내탕금으로 화려하게 중창을 했지만 한국전쟁으로 화마를 입어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현재 남아있는 전각은 1974년에 중건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는 없지만 수종사의 격을 알려주는 유물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보물 제259호인 수종사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7호)내 유물이 있는데 석조부도탑에서 발견된 청자유개호와 그 안에 있던 금동제9층탑 및 은제도금6각감 등 3개의 일괄 유물이 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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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제공 선생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뇌문비.
■번암 채제공과 뇌문비

수원성곽 축조에 큰 공 조선후기 명신
정조가 직접 공덕 칭송하며 비문에 글

'용인 채제공(蔡濟恭·1720~1799) 뇌문비'(경기유형문화재 제76호)는 용인시 역북동 낙은마을 채제공 선생의 묘역 입구 산기슭 북서쪽을 향한 곳에 위치해 있는 비각내에 보존돼 있다.

연립주택 사이를 지난 뒤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개인주택 입구 왼쪽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비각이 보인다. 뇌문비(뢰文碑)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비다.

조선 후기 명신이자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의 장례일에 정조가 채제공의 명복을 신에게 기원하면서 내린 제문(祭文)의 일종인 뇌문을 새긴 것이다.

비는 방형의 백색화강암제 비좌와 오석의 비신 및 팔작지붕 옥개석 형태다. 비문의 내용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의 뜻을 표한 것이다.

건립연대는 비문 말미의 제문을 통해 1899년(정조 23) 3월 26일에 지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채제공 묘(경기도기념물 제17호)는 뇌문비에서 숲속 좁은 길을 따라 50m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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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암 채제공 초상화. 이명기 작품.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번암(樊巖) 채제공은 영조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의 주요 관직을 거쳤고 '열성지장'과 '국조보감'의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영조와 정조대에 걸친 기간 중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수원 성곽 축성에 많은 공을 세워 정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특히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고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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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때 도승지(1758년)가 된 후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란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해 이를 철회시킨 인물이다.

/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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