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원을 꿈꾸다·9]양주 회암사지

왕실 사찰의 영광이여, 결코 잠들지 말라

김신태 기자

발행일 2014-06-25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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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암사지와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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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12세기경 궁궐과 유사한 양식으로 창건 추정
폐사후 절터만 남아 1997년부터 유물 발굴·복원 공사
회랑·장식기와 위용 가늠 부도탑 조각 석조미술 걸작
유교와 갈등으로 퇴색된 수선도량 부흥 꿈꿔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사적 제128호)는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 산자락에 위치한 절터다. 현재는 절터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동안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된 절터 규모와 이 곳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살펴보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는 1997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그동안 10차례 넘게 발굴조사와 복원공사가 진행됐으며 현재도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발굴조사 결과, 옛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가람(伽藍)의 배치가 평지가 아닌 산간에 위치하면서도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회랑(回廊)을 두고 있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받고 있다. 회랑은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다.

그리고 절터에서는 지붕 처마나 추녀마루에 올라가는 토수(吐首), 용두(龍頭), 잡상(雜像)과 같은 장식기와들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이들은 방화(放火), 호법(護法) 등의 의미로 궁궐의 중심 건물에만 올려졌던 조형물이다.

또한 사천왕상을 장식했던 소조장식편과 보살상을 장식하기 위해 별도로 제작된 영락장식 등은 어느 사찰에서도 출토되지 않았던 유물들이다.

여기에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시대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출토됐다. 출토된 도자기 중에는 당시 궁궐이나 왕실과 밀접하게 연관된 왕실사찰 등에서만 사용되던 왕실용 명문백자를 비롯해 사찰에서 기거하던 승려나 불교도들이 사용하던 조질백자까지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망라돼 있다.

지난 2012년 발행된 '회암사지박물관 개관도록'에 따르면 회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의 사신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충선왕 5년(1313)에 태고 보우(太古 普遇·1301~1382)선사가 이 곳에서 광지(廣智)선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기록을 볼때 회암사는 늦어도 12세기 무렵에 창건됐으며 사신이 다녀갈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가 현재의 절터처럼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말, 조선초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佛事)가 이뤄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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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고려말인 공민왕 21년(1372)에는 나옹(懶翁·1320∼1376)선사가 공민왕의 명으로 이 절에 와서 원나라를 통해 들어 온 승려 지공(指空·1300~1361) 선사의 사리탑을 건립했고 1374년부터 2년동안 266칸의 대규모 불사를 벌였다. 이후 우왕 2년(1376) 나옹선사의 제자인 각전에 의해 지금과 같은 규모의 대찰로 완공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유신들의 거센 반발속에서도 회암사는 왕실의 원찰로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태조 이성계는 1393년 무학(無學·1327~1405)대사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불사와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7번이나 이 곳을 다녀갔다.

태조는 또 왕위에서 물러나서도 태종 2년(1402) 무학대사에게 계를 받고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했을뿐만 아니라 태종 5년에 무학대사가 입적하자 그의 탑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회암사는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실들이 불사를 후원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인 김수온(1409∼1481)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따르면 성종 3년(1472)에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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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두
또 명종때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1501~1565)는 승려 보우(普雨)를 통해 불교중흥정책을 펼치면서 회암사를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으로 크게 일으켰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의 비호와 후원을 받던 최대 사찰 회암사는 문정왕후 사후 사세가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명종실록'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명종 21년)"란 기록이나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선조 28년)'란 기록을 볼때 1566~1595년 무렵 유생들의 방화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옛 회암사는 폐사돼 현재 그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지만 양주 회암사지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그대로 남아 옛 회암사의 부흥을 말해주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세워져 있는 약 6m 높이의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은 회암사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다. 웅대한 크기와 부도탑 각 면에 새겨진 뛰어난 조각은 조선전기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주 회암사지 경내에는 이 부도탑 이외에 별도의 불탑이 없어 이것이 승려의 부도인지, 아니면 불탑의 역할을 하는 특별한 예배대상물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양주 회암사지 경내에는 회암사지 당간지주(향토유적 제13호), 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 석조, 집수정 등의 건물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절터에서 500여m 올라가면 현재의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현 회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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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수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 부도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 홍융탑(보물 제388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 홍융탑 앞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등이 위치해 있다.

특히 회암사 삼성각 옆쪽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가 우뚝 서 있다. 고려말 승려인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우왕 3년(1377)에 건립했으나 997년 성묘객의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파손됐다.

비는 지난 2001년부터 경기도박물관에 위탁·보관돼 있고 현재의 자리에는 받침돌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앞쪽에 1999년 원형모습 그대로의 모조비가 세워져 있다.

양주 회암사지 앞쪽에는 지난 2012년 양주시가 개관한 '회암사지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는 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 올라가기 전 박물관에 들러 공부를 하면 회암사를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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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물관은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출토된 각종 기와들을 전시하는 '마루장식기와-건물의 위용과 품격을 담다'란 전시를 24일부터 10월 12일까지 연다.

/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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