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상반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8·끝]센카쿠제도 둘러싼 중·일 갈등과 동북아

'센카쿠' 영유권서 명예싸움 비화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4-06-26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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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지난 24일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일간 갈등과 동북아'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중·일간 갈등의 원인을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으로 정리하고, 분쟁의 쟁점에 대해 설명했다. /인하대한국학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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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日 국유화 결정 '판단유보' 암묵적 합의 파기
'중화부흥-반중' 이익 아닌 국가 체면 문제로 번져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외교적 갈등은 단순한 영토분쟁이나 상호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명예가 걸린 문제가 됐다.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지난 24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문학강좌에 강사로 나와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일간 갈등과 동북아'란 주제로 강연했다.

이 연구위원은 강연에서 센카쿠제도를 둘러싸고 험악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일간 갈등의 원인을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으로 정리하고, 분쟁의 쟁점에 대해 설명했다.

센카쿠제도에 대한 갈등은 먼저 일본의 실수에서 출발, 확대됐다. 2010년 9월 간 나오토 정부는 센카쿠제도 주변 해역에서 조업하던 중국어선 선장을 체포해 국내법으로 엄정히 징벌하고자 했다. 당시 중·일간 유지돼 오던 '판단유보'의 암묵적 합의를 깨트린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1978년 평화우호조약 체결 당시 센카쿠 영유권 문제는 다음 세대로 넘기자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는데 일본이 '판단보류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라며 "그 결과 중·일간 무력충돌이 가능한 시대로 진입하게 됐다"고 했다.

일본 민주당 정부가 작은 사건을 큰 갈등으로 번지게 하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센카쿠 국유화에 결사반대 의향을 전한 직후 일본 정부가 국유화를 결정한 것은 후진타오 주석의 체면을 구기게 했고, 중국의 강경대응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센카쿠제도 문제를 본질적으로 어렵게 하는 것은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와 일본이 주장하는 '선점의 법리'간 비대칭 대립이다. 이 논점에서 핵심은 센카쿠제도가 역사적으로 무인도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오랜 문헌에 영유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기술이 있었지만, 실제 무인도에 사람을 파견시키진 않았다.

2010년 9월 중·일간 충돌이 확대된 배경에는 당시 국토교통성 장관이었던 마에하라 세이지의 개인적인 친미반중적 성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미국을 배제하고자 한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미일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이에 위기의식을 가졌던 마에하라 등 친미세력이 '중국위협론'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 센카쿠제도 사건이라는 얘기다.

이 연구위원은 "결론적으로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일간 분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국인에게 내재된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중화부흥'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출발의 의미라 하겠다"라며 "중·일간 센카쿠제도 문제는 더이상 사실의 문제나 상호 이익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명예에 관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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