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7]고유섭

미술가의 눈으로 스케치 하고

문학가의 꿈으로 기록한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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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박성현기자
우리나라 최초 '미술사학자'로 유명
문학청년 시절 '경인팔경' 대표작 꼽혀
주안염전 등 계절별 풍경 시조로 풀어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리더로 활동

어지간한 문인보다 구성·문체 뛰어나
1920년대 인천소재 작품 드물어 '의미'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1905~1944)에게도 그럴듯한 문학청년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흥이 날 때마다 쓴 일기문조차 소소하지 않았고, 글을 구성하는 방식과 문체가 보통을 넘었다.

그는 대학에서 미술사·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뒤부터 길지 않은 여생을 조선미술사를 연구하고 기술하는 일에 바쳤다.

그 와중에도 우현은 고려 공민왕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취재했었다.

우현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도 동시에 '문학가'를 꿈꾸었던 듯하다.

그는 문학가를 '소설·극, 기타 언어 표현을 요하는 예술가'로 정의했고, 고향 인천에서 문학적 자질을 갈고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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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립박물관 정문 앞 광장에 우현 고유섭 동상이 있다. 1992년 건립됐다. /김명래기자

'문학가 우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경인팔경(京仁八景)'이다. 집이 있는 인천에서 서울의 학교까지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면서 겪은, 계절별 지역별 풍경과 소회를 시조로 풀어낸 작품이다. 우현은 1920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인천에서 통학했다.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25년에 경인팔경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시조가 발표되고 약 90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들이 볼 때는 그 시조 속 내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기만 하다.

이를테면 '염전(鹽田) 추경(秋景)'에서 우현이 "물빛엔 흰 뫼 지고 고범(孤帆)은 아득하다"고 한 건 주안 염전 풍경이다. 염전 바닥에 쌓인 소금 더미가 염수에 비친 모습과 저 너머 갯골을 묘사한 것이리라. 그 염전 자리는 지금의 수출 5·6공단 일대다. 당시 일제가 기록(1927년 '조선철도연선요람')한 주안역은 "역은 인천항에서 동북으로 일 마일 반(半)의 거리를 두고 있고, 경인가도에서 염전에 이르는 도로에 붙어 있으며, 동남에는 기복이 심한 구릉이 있고 서북에 있는 염전은 관제 천일염의 산지로 유명하다"고 그려져 있다.

주안 염전에서 나온 소금은 주안역을 통해 대전, 영동, 김천, 옥천, 조치원 등지로 수송됐다. 1920년대만 해도 지금의 십정동, 간석동 부근까지 물길(갯골)이 나 있었다. 그 주안 염전의 흔적은 홈플러스 간석점 북측, 십정동 558의7 공장용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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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반도의 근영'에 나온 천일염전. /인천시립박물관
지난 28일 오후 1시, 새천년환경 건설폐기물집하장 출입구와 우주자원 사이 폐컨테이너 부근에서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지'란 표지석을 어렵게 찾을 수 있었다. 1989년 1월 인천시가 건립한 것인데, 이 표지석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을 정도로 꼭꼭 숨어 있다.

8편 연시조 경인팔경은 '효창원(孝昌園) 춘경(春景)'에서 시작해 '차중(車中) 동경(冬景)'에서 끝을 맺는다. 마지막 편을 읽으면 서울서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을 실은, 한겨울 해질녘의 경인기차 내부 모습이 선하다.

앞바다 검어들고 곁 산(山)은 희여진다 / 만뢰(萬뢰)가 적요(寂寥)컨만 수레 소리 요란하다 / 이 중에 차중정화(車中情話)를 알려 적어 하노라

깊은 겨울밤, 자연의 온갖 소리(만뢰)가 잦아들었지만, 기차 안에서 정담이 이어진다. 이 구절에서 '경인기차통학생회 친목회'를 떠올릴 수 있다. 인천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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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경 아내 이점옥(왼쪽), 장녀 병숙(가운데)과 찍은 사진. /'우현 고유섭 전집', 열화당
경인기차통학생회가 배출한 문인은 고유섭을 비롯해 평론가 김동석, 극작가 함세덕, 소설가 현덕, 시인 배인철 등 쟁쟁한 인물이 많다. 문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고일은 "인천에 있어서 문화운동사의 제1페이지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서 발단했다"고 '인천석금'에 썼다.

'철도와 문학' 연구자인 조성면 박사는 "우현은 경성제대 예과 2회 입학생으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의 리더 역할을 했다"며 "전통 시조 형식으로 가장 근대적 문물인 철도를 그렸다"고 했다.
보성고보 입학 첫 해, 기차간에 있던 우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학에 처음 입학하던 해 차 속에서 매일같이 읽던 톨스토이의 '은둔'이란 소설의 기억이다. 그때 어느 상급학교에 다니던 연장(年長)이던 통학생은 내가 조그만 일개 중학 일년생으로 이런 문학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매우 건방져 보였던지, 또는 부담스러이 보였던지는 모르나, 그것을 읽어 아느냐는 물음을 받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중략) 오늘 끝없이 맑고 맑은 창공에 저 산을 넘고, 내를 끼고, 들을 덮어 길 넘는 뜰 앞의 풀 덤불을 스치며 기어드는 금풍(金風)을 가슴으로 맞이하며 톨스토이 작품집에서 '신부 세르게이'(이와나미본 12집)를 찾아 다시 읽어 보았다. 휘몰아 읽다가, 벅차면 코스모스에서 눈을 쉬고, 다시 읽다가는 이름 모를 청화(靑花)에서 숨을 쉬다가 얼마 아니하여 독파하고 보니, 인상은 다시 새로웠다.('정적한 신의 세계-삼매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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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플러스 간석점 북측 길건너 공장용지 한구석에 주안 염전 표지석이 있다. 관리가 전혀 안 돼 찾기 힘들다. /김명래기자
우현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에 입학(1914년)하기 전에 '인천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김병훈 선생이 세운 의성사숙에서 시·서·화를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의성사숙 문하생으로 서예가인 유희강, 법원 판결 한글화를 이끈 조진만 대법원장 등이 있다. 우현이 한문을 배우고 동양고전을 체득하고 그림에 능할 수 있었던 자질은 김병훈 선생에게 익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우현 고유섭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여러 미문을 남겼다. 우현의 붓끝에 담긴 당대 인천의 모습이 새롭다.

추풍이 건듯 불기로 교외로 산책을 하였다. 능허대(凌虛臺) 가는 길에 도공(陶工)의 제작을 구경하고 다시 모래밭 위에 추광을 마시니, 해향(海香)이 그윽히 가슴에 스며든다. 벙어리에게 길을 물어 가며 문학산(文鶴山) 고개를 넘으니, 원근이 눈앞에 전개되고, 추기(秋氣)가 만야에 넘쳤다. 산악의 초토에도 추광이 명랑하다. 미추홀(彌鄒忽)의 고도(古都)를 찾아 영천(靈泉)에 물마시고 대야(大野)를 거닐다가 선도(仙桃)로 여름을 작별하고 마니라.('애상(哀想)의 청춘일기' 중)

가을 바람이 슬쩍 불어온다고, 발걸음을 떼고 십 리 길을 걸어 능허대로 향하며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는 이십대 문학 청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옛날 백제시대 중국 사신들이 후풍(候風) 하던 유서 깊은 능허대도 찾아 문장에 담았다.

우현은 이 글에서 "능허대라는 것은 인천서 해안선을 끼고 남편(南便)으로 한 십 리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모래 섬이나,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으로만 걸어가게 된 풍치있는 곳"이라고 했다.

백제문화사를 연구한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용동에서 출발했다면 숭의로터리, 용현고개, 옥련동 조개고개를 넘어 능허대를 찾아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능허대로 가는 길의 산기슭에 독 굽는 가마가 있었고, 해안의 약물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셨다고 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능허대는 1950년대 이후 옛 자취를 감추고 육지로 변한 지 오래다. LG아파트, 윤성아파트, 백산2차아파트 사이 능허대공원에 '중국 내왕 사신 배 대이는 곳'이라고 적힌 표석만이 그 터임을 알릴 뿐이다.

우현이 문학산에 올라 미추홀의 옛 도읍을 떠올렸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는 평소에 "백제의 고도 미추홀에서 나고, 조선의 도읍인 한양에서 자랐으며, 고려의 도읍인 송경(松京)에 몸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공부했고, 개성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 조선, 고려의 수도와 자신의 인연이 유난히 깊음을 빗댄 것이다.

고유섭은 인천에서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월미도', '낙조(落照)', '서공원(西公園)', '신록(新綠)' 4가지를 꼽았다. '명산대천(名山大川)'이란 제목의 글에서 우현은 인천을 프랑스 인상파 화가의 화폭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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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현 고유섭은 그림과 글씨도 뛰어났다. 우현이 그린 자화상. /'우현 고유섭 전집', 열화당
강화·교동·영종·덕적·팔미·송도·월미의 대소 원근의 도서가 중중첩첩이 둘리고 위워진 가까운 인천 바다를 들자, 아침마다 안개와 해미를 타고 스며 퍼져 떠나가는 기선의 경적 소리, 동으로 새벽 햇발은 산으로서 밝아 오고, 산기슭 검푸른 물결 속으로 어둔 밤이 스며들면서 한둘, 네다섯 안계(眼界)로 더 드는 배,배,배. (중략) 먼 배는 잠을 자나 가도 오도 안 하고, 가까운 배는 삯 받는 역졸(驛卒)인가 왜 그리 서둘러 빨리 가노. 만국공원의 홍화녹림(紅花綠林)을 일부 데포르메(변형한다는 뜻의 미술 용어)하고, 영사관의 날리는 이국기를 전경에 집어 넣으면 그대로 모네(C. Monet)가 된다.

고유섭은 미술사학자 답게 외세의 물결에 밀려 사라져가는 고향 인천의 역사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소성(邵城)은 해변(海邊)이지요 / 그러나 그 성(城)터를 볼 수 없어요 / 차고 찬 하늘과 산이 입 맞출 때에 / 이는 불길이 녹혔나 보아요 / (중략) / 나의 옛집은 해변이지요 / 그러나 초석(礎石)조차 볼 수 없어요 / 사방으로 밀쳐 드난 물결이란 / 참으로 슬퍼요 해변에 살기 ('해변에 살기' 중)

우현은 인천에서 낙재고중(樂在苦中)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했다. '즐거움은 번민하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또 그는 인천 시절을 "비애를 느끼고 적막을 느끼고 번민을 스스로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썼다.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1920년대 인천에 대해 쓴 문학 작품이 거의 없고, 이 같은 측면에서 우현의 작품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며 "작품 수준도 어지간한 문인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글 =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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