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원을 꿈꾸다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1]안성 칠장사와 죽주산성

유서 깊은 이야기, 사찰을 감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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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장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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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년 신라 고승 자장율사의 창건설
궁예의 무예연마·병해대사 제자 임꺽정
명부전엔 각종 설화 벽화로 남겨져 있어
경기도 절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 간직
혜소국사비·국보 오불회괘불탱 등 보존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에 위치한 칠장사(七長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는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경기도내 사찰 중 가장 많은 유물을 갖고 있고 궁예와 임꺽정 등의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특히 어사 박문수가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장원급제를 했다고 해서 지금도 수험생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인 칠장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2년인 648년에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칠장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시대 대선사인 혜소국사가 중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 안성 죽산 출생이다. 9세에 수원 광교사에서 충회대사에게 출가했다. 훗날 문종에 의해 왕사(王師)로 추대됐고 83세에 국사가 돼 칠장사에서 입적했다.

칠장사의 원래 이름은 '아미산(峨嵋山) 칠장사(漆長寺)'였으나 혜소국사가 7명의 악인을 교화해 칠현(七賢)이 된 이후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칠장사는 여러차례 화재에 의해 소실됐다. 1383년(우왕 9)과 1506년(연산군 12)에 각각 중건됐다. 왜구가 침입했을 때는 충주 개천사의 사적(史籍)을 칠장사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이후 칠장사는 크고 작은 보수와 중건, 이건 등이 꾸준히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웅전과 원통전, 명부전, 나한전, 산신각, 천왕문 등이 원형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채와 박물관, 혜소국사 비각, 일주문 등은 새롭게 지어졌다.

칠장사에는 사찰의 오래된 역사만큼 중요한 문화재들이 많다. 국보 296호인 칠장사오불회괘불탱, 보물 488호인 칠장사 혜소국사비, 보물 1256호인 칠장사 삼불회괘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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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장사 혜소국비.
이중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있는 혜소국사비(문종 14년, 1060)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밖에 칠장사 철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39호), 칠장사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114호), 칠장사 천왕문과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15호), 안성칠장사대웅전목조석가삼존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213호), 안성 칠장사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경기도 유형문화재 227호), 안성 칠장사 범종(경기도 유형문화재 238호), 안성 칠장사 대웅전영산회상도(경기도 유형문화재 239호) 등 셀 수 없는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칠장사의 수많은 문화재중 '인목왕후 어필 칠언 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였다가 지난 2010년 1월 보물 1627호로 지정됐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다. 인목대비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칠장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중수한다음 '금광명최승왕경' 10권과 함께 이 시를 하사했다.

시의 내용은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목덜미 쭈그러들고 가죽은 헤져서 다만 졸리울 뿐 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도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다. 이 시는 늙은 소의 고달픔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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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
또 보물 983호인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칠장사로 이전한 것이다. 파손이 심한 상태이지만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우수해 고려시대 초반의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칠장사 명부전에는 칠장사와 얽힌 갖가지 이야기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벽화에서는 한눈을 가린 궁예의 모습이 보이고 임꺽정과 병해대사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다. 후고구려의 왕이었던 궁예는 이 곳 칠장사에서 13세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고 전해진다.

궁예의 어릴적 활쏘는 모습이 명부전의 벽화로 그려져 있다. 또 백정의 아들로 천민이라 설움을 받던 임꺽정은 칠장사에 법력이 높은 고승(병해대사)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칠장사를 찾았고 병해대사는 임꺽정과 그 도적무리들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벽에 그려진 병해대사와 임꺽정 등이 칠장사의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혜소국사의 나눔과 소통사상을 계승하기 위해 칠장사는 매년 일정량의 쌀을 안성시에 전달, 지역의 저소득층을 지원하고 있다. 혜소국사는 당시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 칠장사 아랫마을 백성들은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칠장사 주지 지강스님은 "삼의일발(三衣一鉢), 즉 옷 세벌과 밥그릇 하나면 족하다"며 "너무 많은 걸 가진 이들이 나누지 않고 물질을 좇아 화와 불행을 만들고 있는게 현실"이라며 "안성불교사암연합회 사찰들과 함께 부처님의 자비나눔을 실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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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과 접경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
산성안엔 몽고 침략 막은 송문주사당


죽주산성은 안성시 북동쪽에 위치한 해발 372m 높이의 비봉산과 이어지는 동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죽주산성은 조망이 사방으로 양호해 과거 서울에서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를 방어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다.

죽산은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죽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현재 행정단위인 안성과는 독립된 행정구역을 유지해 왔다.

지형이나 수계로 볼때 죽산은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지만 금강 유역권에 속하는 진천, 청주지역과 안성천 유역권에 속하는 안성·평택지역과 접하고 있어 타 지역으로 나가는 관문 구실을 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고대부터 죽산은 교통의 중심지,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 받아왔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북쪽에서 차령산맥 이남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 구실을 한다면 반대로 남쪽에서 한성으로 진출하거나 아산만의 국제무역항인 당진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죽주산성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죽주산성의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때 고구려나 백제보다 신라쪽에서 죽주산성의 활용도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고 침입때 죽주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죽주산성이 삼남으로 통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몽고군은 개경-한양-용인-죽산-충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따라서 영남지역으로 침입했다. 죽산은 영남과 충청도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몽고군 주력부대의 치열한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죽산은 영남대로에서 진천-청주-보은 등으로 통하는 도로가 결절되는 지점이었으므로 죽산은 충청·영남 방면에서 서울로 향하는 인마와 물자가 집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후기에 들어 죽주부사 자리는 재주와 명망이 있는 문관을 가려 보냈다.

죽주산성내에는 고려때 몽고 침략시 죽주산성에서 적의 공격을 물리쳐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오른 송문주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정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비문을 썼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고지도 상에 대부분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표시돼 있는 등 과거부터 죽주산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설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도 매년 '동안성 죽주문화축제'때 송문주 장군 고유제가 열리고 있다.

본관이 진천인 송 장군은 1차 몽고 침입시 박서 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해 그 공로로 고종 23년(1236) 죽주의 방호별감으로 승진됐다. 이해 9월 몽고군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했으나 성중의 군리들과 합심해 몽고군을 격퇴, 다시 한번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귀주성의 전투경험을 통해 몽고군의 공성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지략을 보고 군사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

복원 동문에서 송문주 장군 사당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는 산신각이 위치해 있고 산신제각에서 동문으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도 2개의 건물로 이뤄진 사찰이 하나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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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주산성 동문 안쪽에 위치한 약수터는 수량이 풍부하고 약수를 뜨기 위해 약수터를 찾는 주민이 있을 정도로 물 맛이 좋다는 평을 받고 있다.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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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ta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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