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8주년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

[다시 대중일보를 생각하다]50년 선배에 듣는 그때 그시절 언론

군부에 편집 결재받아… 기자는 제작거부로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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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지역 언론계의 대선배인 신원철 연수원로모임 회장이 1960~70년대 당시 경인지역 언론의 태동과 통폐합의 아픔, 그당시 치열했던 취재이야기와 그 뒷이야기들을 그동안 직접 모아온 자료들을 보여주며 경인일보 막내기자인 윤설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역사적으로 언론의 역할이 한시도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자에게 '기레기'(기자+쓰레기 합성어)라는 말이 서슴없이 붙고, 심지어 신문은 '찌라시'라는 소리를 듣기도 할 만큼 그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신문이 이렇게 인식되는 걸 보면 올해부터 경인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한 초년 기자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고 했다. 언론의 역사를 모르고는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경인일보 막내인 윤설아 기자가 언론계의 50년 선배인 신원철(74) 인천 연수원로모임 회장을 지난 8월 14일 만났다. 신 회장은 1964년 인천에 있던 '동양통신 경기지사'에서 처음 기자생활을 했다.

신원철 회장은 경인지역 언론의 태동지역인 인천에서, 중앙지 기자로 있으면서 1960~70년대를 산 몇 안 남은 외근 기자 대선배다. 신원철 회장과 함께 그 시절 속으로 들어가 보자.



# 까까머리 청년, 기자가 되다

1964년 여름 군대에서 막 제대한 까까머리 청년이 인천 숭의동, 그러니까 지금의 인천시 남구청 인근의 한 기와집 앞을 서성였다. 인천지역에서도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김은하 국회의원의 집이었다.

이 청년은 제대 후 '뭐하고 사나' 고민하다가 인천기계공고 육상부 선수로 전국을 제패할 당시 인천육상연맹 회장으로 알게 된 김은하 국회의원을 무작정 찾았다.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동양통신'에 발을 들였다. 김은하는 서울 수복 이후 인천에 동양통신 경기지사를 차린 지역의 유지였다.

동양통신은 인천지역 기자의 산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벽, 장세광, 최경조 등 당대 내로라하는 언론인들이 동양통신 출신이다. 막내기자 신원철이 동양통신에서 처음 만난 선배가 이벽(1926~2000)이었다.

그리고 처음 하게 된 일은 인쇄된 기사를 언론사, 공공기관, 기업체에 전달해 주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노트북으로 기사를 써서 전산프로그램에 전송하면 그만이지만, 당시엔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신문을 만들었다. 기자가 기사를 써서 넘기면 필경사가 그걸 베껴서 신문을 만들었다.

"일단 출근은 했는데, 뭘 가르쳐 주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고 맨날 심부름이나 보냈어요. 주로 하는 일이 '가리방'(철필) 긁는 일이었지요. 먹지 같은 종이에 철필로 기사를 쓰고 그 종이를 등사판에 올려 놓은 다음 검정색 잉크를 롤러로 밀어 인쇄를 하는 등사판 방식이었습니다."

1964년 동양통신의 '고객'이었던 인천지역 언론사는 경기매일신문과 인천신문 2개뿐이었다. 경기매일신문은 1945년 10월 7일 해방 이후 경인지역에서 첫 창간된 지역신문 '대중일보'의 후신이다.

송수안이 중심이 돼 만든 대중일보는 전쟁을 겪으면서 인천신보(1950년 9월), 기호일보(1957년 7월)를 거쳐 경기매일신문(1960년 7월)으로 이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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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신문은 허합이 주간인천을 인수해 1960년 8월 창간한 신문이었다. 경기일보는 이보다 늦은 1966년 2월 인천에서 출발했다. 동양통신 기사는 신문사 이외에도 시청, 세관, 경찰 등 관공서와 선박, 유통업체 등이 받아 봤다고 한다.

당시 인천지역 언론인의 주머니 사정은 어땠을까. 동양통신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은 필경사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기자들은 어떻게 생활을 했던 걸까. 신원철 회장은 자신이 매일 배달하던 '봉투'에 그 답이 있다고 했다.

"당시 지사장, 선임기자 2명, 초임기자 2명, 필경사 1명이 있었는데, 필경사 빼고는 월급이 없어요. 선배들이 자꾸 어디 가서 봉투를 가져오라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촌지'였습니다. 그걸로 생활을 하는 거였더라고요. 결국 무보수로 일하면서 햇수로 2년간 동양통신을 다녔던 겁니다."

신 회장은 동양통신 경력을 바탕으로 1966년 3월 24일 매일경제 공채 1기로 입사했다.

# 언론통제와 프레스카드

1961년 5·16 군사정변 전후 정권의 부패와 맞물려 기자들도 덩달아 부패했다. 기자 명함을 무기로 지니고 다니는 소위 '사이비 기자'가 판을 쳤다.

밀주를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 돈을 뜯어내거나 불법 과외교습을 하는 교사를 조사해 뒷돈을 받는 기자들이 더러 있었다는 것이 신 회장의 설명이다. 지금 들으면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당시에는 기자증이 있으면 군대도 안 갔다고 한다.

1971년 12월 21일 박정희 정권은 '언론자율 정화에 관한 결정사항'을 각 신문, 방송, 통신사에 공표하고, 이듬해 2월 1일자로 문화공보부 장관 명의의 프레스카드를 기자들에게 발급했다. 프레스카드가 없는 기자는 취재에 응하지 말라는 공문을 각 관공서에 보내기도 했다.

이 프레스카드는 일종의 관공서 '출입증' 기능도 겸했다. 겉으로는 사이비기자를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속내는 기자들을 관리하고, 정부비판 기사를 사전에 검열하겠다는 의도였다. 신 회장은 그동안 각 출입처에서 받은 프레스카드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인천언론인클럽이 2008년에 낸 '인천언론사'를 보면 당시 프레스카드 제도로 인해 18개 중앙 일간신문사, 통신사에서 각 사별 4~6명까지 주재하던 기자들이 1~2명으로 줄었고, 전체적으로는 200여 명에서 50여 명으로 급감했다. 일부 중앙 일간신문, 방송이 통폐합됐고, 통신사의 경우 합동, 시사, 동화, 동양, 경제통신이 통폐합돼 '연합통신'(현재 연합뉴스) 단 한곳만 남게 됐다. 프레스카드 제도는 1988년 1월 막을 내렸다.

"정부기관에서 신문사에 상주하면서 편집에 관여를 하고, 맘에 안 드는 기사가 있으면 삭제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재 받아서 편집하고, 언론인을 구타하고, 구속하고 신체적 모욕감을 주기도 한 암울한 시기였어요."

기자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제작거부로 맞섰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해직이었다. 이른바 동아·조선 해직기자 사건이다. 경인지역 언론도 군부독재의 언론탄압에 펜을 꺾지 않으려 애썼다.

계엄철폐 시위가 한창이었던 1980년 5월 15일 경기신문은 "부당한 압력 속에서도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 공정보도를 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다음날 이를 신문에 게재했다.

신원철 회장은 기자들의 잇따른 해직으로 경력기자를 뽑던 조선일보에 1979년 3월 2일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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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언론 3사 통합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은 중앙·지역 가릴 것 없이 단행됐다. 1973년 9월 1일 경기·인천지역 신문사 3곳은 정부의 1도(道) 1사(社) 정책에 따라 통폐합되는 아픔을 겪었다.

앞서 소개한 '경기매일신문'과 1960년 창간했다가 1969년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 인천신문의 후신 '연합신문', 1966년 2월 인천에서 창간된 '경기일보'가 하나로 합쳐져 '경기신문'이 되었다. 통폐합 과정에서 주도권은 연합신문이 쥐었다.

신원철 회장은 이에 대해 "힘의 논리에서 인천이 수원에 졌다"고 해석했다. 당시 통합 신문사 본사는 경기도청이 있는 수원에 둬야한다는 것이 명목상 이유였지만, 앞서 1967년 서울에 있던 도청을 수원에 넘겨준 것부터가 힘에서 밀린 것이라고 신 회장은 설명한다. 신 회장은 당시 수원 국회의원이었던 이병희의 '로비'가 크게 작용했다고 기억한다.

"힘의 논리, 로비 부족으로 수원에 본사를 두게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수원 국회의원 이병희 씨와 관계가 많지요. 서울에 있던 교육위원회, 도청, 병무청까지 뺏긴 것이 다 힘의 논리에서 밀린 것이죠.

인천이 인구도 많고 문화 등이 다 집중돼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인천엔 유승원이라는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그가 아무리 대령 출신 '혁명주체'였어도, 이병희 조직, 체계에 대응하기엔 부족했던 것 같아요."

# 신문기자와 고스톱

화투나 포커가 기자들의 일상이다시피한 적도 있었다. 물론 판돈은 기자를 '관리'하던 공무원 주머니에서 나왔다. 신원철 회장은 당시 고스톱 판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풍문으로만 듣던 그때 그 시절 얘기다.

언론통제로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어느날 대통령 앞으로 인천시청 총무과장 명의의 투서 한 장이 전달됐다. "인천시청 출입기자 5명이 매일같이 기자실에서 포커와 고스톱을 치고 중국집에서 요리와 고량주를 시켜 먹고 각 국장에게 돈 달라고 손 벌린다. 게다가 고스톱 자리에선 정부정책을 비판하기도 하니 엄중히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각 사 편집국장에게 진위여부를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군사정권 대통령 비서실장에게서 내려왔으니 살아날 길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기자실에서 고스톱 판을 벌이는 게 어디 인천시청 기자실만의 일이었겠는가.

결국 기자들은 "죽어도 안 했다"고 버텼고, 각 사 편집국장들도 모르는 척 눈감았다.
함께 포커치고 놀던 기자의 부인이 남편이 매일같이 술 먹고 노름을 하느라 집에 안 들어오니까 홧김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이른 아침 기자실에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 기자,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치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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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탄압의 시절이나 자유로운 취재활동이 보장되는 요즘에나 기자는 늘 '치열한 취재경쟁' 속에 놓여 있다. 신 회장도 당시 전쟁과도 같았던 취재경쟁 상황을 들려줬다.

"일단 조간이나 석간이나 서로 특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찰 상황실장을 매수하기도 하고, '사스마와리'라고 경찰서를 뺑뺑이 도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이 아니겠어요. 그땐 경찰서 유치장 수감자들도 취재했으니까요. 옛날엔 지금과 같이 통신기기가 발달한 시기가 아니라서 잡음이 심한 파출소 무전기로 상황을 전해 듣고 데스크에 보고했던 기억이 나네요."

신원철 회장은 80년대 초까지 기자생활을 하고, 교육출판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인천시교육위원을 거쳐 1995년 초대 민선 연수구청장에 당선돼 내리 2선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비판,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기자 시절이 가장 뜻 깊은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오늘날 언론을 "자유가 보장된 만큼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취재대상에 제한이 없어져 가능한 모든 것을 소재로 기사를 쓸 수 있지만,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막내둥이 윤설아 기자는 50년 뒤 신출내기 기자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글/김민재기자
사진/조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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