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1]조세희 '난쏘공'

일한 만큼 대우받는 세상 '난장이의 꿈은' 아직도…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4-11-06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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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12편 묶어 1978년 펴낸 '스테디셀러'
주요 배경 '은강 = 인천' '기계도시 = 만석동'
이젠 주민수 크게 줄어 활기잃은 공장지대

삼남매 통해 인천지역 노동착취 현실 담아내
지금도 임금 수준은 타지역보다 '열악'
"배고파 우는 아이 방관도 폭력" 메시지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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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구 만석동은 면적 1.15㎢ 중 절반이 넘는 0.66㎢(59%)가 공장지대다. 두산인프라코어, 동일방직, 동아원, 삼미, 삼화제분, 한국기초소재, 혁진산업, 원일제강, 올파인텍 등 크고 작은 공장 50여 개가 이 작은 동네에 들어서 있다.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출퇴근 시간대 만석동거리는 공장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공장 숫자는 많지만 언제부턴가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이 됐다. 공장지대로서의 활기마저 잃었다.

지난 4일 만석동 주민 김선현(84·여) 씨는 "(1970년대에는) 사람이 말도 못했어. 젊은이들이 많았고. 정말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지"라고 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72)도 당시 인파의 어느 틈엔가 끼어 사람들을 관찰했을 것이다.

'난쏘공'이란 줄임말로 더 잘 알려진 이 스테디셀러의 주요 배경인 '은강'은 인천이고, '기계도시'로 설명하는 공장지대는 동구 만석동이다.

은강의 면적은 백구십육제곱킬로미터, 인구는 팔십일만 명이다.…(중략)…은강 공업 지대는 금속·도자기·화학·유지·조선·목재·판유리·섬유·전자·자동차·제강 공업이 성하고, 특히 판유리는 한국 최고의 존재로 교과서에 나와 있다. -<난쏘공 '기계도시' 중에서>

조세희는 1975년부터 3년 동안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등 8곳에 연작소설 12편을 발표했고, 이를 묶어 1978년 6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출간했다. 작품의 배경인 은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이 포함된 '기계도시'는 1977년 6월 '대학신문'에 실렸다.

1977년 하반기 나온 인천통계연보는 인천 면적을 199.9㎢, 인구를 83만명(1976년 10월 기준)으로 기록했다. 한국판유리(한국유리공업) 공장도 인천 만석동에 있었다. 1950년대 만석동에 자리잡은 판유리 공장은 국가기간산업 육성 정책에 따라 건설됐다. 주민들은 "엘리트들이 다니는 공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1970년대 인천은 중구, 동구, 남구, 북구로 나뉘어 있었다. 1976년 인천 동구에는 17만3천명이 살았고, 만석동 주민 수는 1만6천500명이었다. 한 가구당 가족수는 4.6명이었다. 지난 9월말 기준 만석동 인구는 7천900명이다. 30여년 전에 비해 인구가 절반 이상이나 준 것이다.

만석동에서 만난 손강식(63) 씨는 "지금 동일방직 주변과 만석비치타운 정문쪽은 출퇴근시간에 사람으로 가득했다"며 "지금의 아카사키촌(만석동 9)에는 막걸리집이 꽤 있어 퇴근길 노동자들이 들어가 한잔씩 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열심히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잃었"던 난장이와 그의 가족(아내와 3남매)을 그린 난쏘공에서 은강(인천)은 암울하다. 서울 낙원구 행복동에서 난장이 아빠를 하늘로 떠나보낸 뒤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보겠다고 정착한 곳이 은강이다. 소설은 은강을 "버려진 도시"로 묘사한다.

수없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공장 안에서는 기계들이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한다. 죽은 난장이의 아들딸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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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 출생으로 서라벌예대 문창과,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8년 연작 소설 12편을 묶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출간했다. 그는

그곳 공기 속에는 유독 가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이 섞여 있다. 모든 공장이 제품 생산량에 비례하는 흑갈색·황갈색의 폐수·폐유를 하천으로 토해낸다.…(중략)… 공장 주변의 생물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인천 동구 서쪽 끄트머리 바다를 끼고 있는 만석동에서는 삼미, 그 옆 북성동에서는 대성목재 등이 바다에 저목장(목재 저장소)을 운영했다. 밀물이 들 때 주민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저목장에 나가 원목의 껍질을 벗겼다. 나무 껍질은 땔감으로 쓰고, 남는 것을 팔았다.

1970년 중학생 때 북성동에 정착한 백석두(59) 흥사단 인천지부장은 "대성목재 주변 폐수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며 "나무 껍질을 벗기다가 물에 빠지면 몸이 새까맣게 될 정도였다"고 했다. 동구에서도 만석동은 낙후한 동네였다.

동구 송림동에서 닭알탕집을 운영하는 정봉덕(74·여) 씨는 "70년대 만석부두 옆에 가본 적이 있는데, 동네 화장실은 넘쳐 흘러 냄새가 지독했고 담장에 나무 껍질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 '이런 동네가 다 있나'하고 놀랐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던 이들은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노동 착취에 시달렸다. 난쏘공에서 난장이네 큰아들 영수는 공장(은강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기계와 매일 사투를 벌인다.

콘베어를 이용한 연속 작업이 나를 몰아붙였다. 기계가 작업 속도를 결정했다.…(중략)…날마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나를 구해주고는 했다.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중략)… 혓바늘이 빨갛게 돋고, 입에서는 고무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물로 양치질을 해도 냄새가 났다. 큰 식당에 가 차례를 기다려 밥을 타지만 수저를 드는 손은 언제나 떨리기만 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비숙련 노동자들이 만석동에 와 부두, 공장에 취직했다. 노동시간이 길고, 임금이 낮아도 입에 풀칠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난 2일 오전 만석동 9번지의 조그만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있던 임순서(76) 씨도 그랬다고 했다. 1970년대 전북 김제에서 인천으로 올라온 그의 첫 직장은 만석동 삼미사(三美社)였다고 한다.

"기술이 있어야 돈을 벌지. 여기저기 뜨내기로 그냥 주면 주는대로 받고. 말 많으면 사람 안 쓰니까. 행여나 내년은 괜찮을까, 내년은 괜찮을까. 그러면서 온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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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석동 전경 사진이다. 조세희는 난쏘공에서 만석동을 배경으로 한 은강이란 도시의 풍경을
소설에서 난장이 삼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하고 한 달에 모두 합해 8만231원을 번다. 보험료, 국민저축, 상조회비, 노조비, 후생비, 식비 등을 빼면 6만2천351원을 쥔다. 난쏘공이 출간된 1978년에 한국노총이 발표한 '18세 전후 근로자 최저임금선'이 월 4만8천원이었다.

셋이 합하면 아무리 못 벌어도 14만원 이상을 벌었어야 했는데 여기에 크게 못 미쳤다. 그래서 난장이네 가족은 월급을 생계비가 아닌 '생존비'라고 부른다.

지금의 인천 만석동 주변 근로자 처우는 난쏘공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난 4일 만석동주민센터 입구의 취업게시판이 열악한 현실을 보여줬다. 나붙은 모집 공고는 저임금 일자리가 대부분이었다. '지게차 운전, 납품 배송원'은 월급이 180만원(청년층 우대)이었고, 철강 재료 무역 업체 경리 회계 사무원은 연봉이 2천만원이었다.

그나마 경력 3년 이상이 지원할 수 있고, 토요일은 격주마다 나와 일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식당 주방 보조원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130만원이었다. 휴무일은 매월 이틀뿐이었다.

인천상공회의소가 지난 3월 발표한 '10인 이상 제조업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천의 제조업 1인당 평균 급여액은 3천275만원으로 전국 평균(3천581만원)보다 낮았다.

"종업원 10인 이하의 제조업체에 대한 통계는 따로 나와 있지 않지만, 임금 수준이 다른 지역보다 크게 열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인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말했다.

난쏘공은 낯선 형식의 소설이다. 이야기가 시간 흐름에 따라 전개되지 않고, 소설 속 화자도 여러 명이다.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출간 6개월만에 9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됐다. 처음 접하는 형식과 내용의 소설에 지식인층은 충격을 받았다.

사회과학도들은 이 책을 교재 삼아 공부했다. 영화가 제작되고 연극으로도 올랐다. 노동자들은 이 책을 읽고 세상에 눈을 떴다. 조세희는 인천 만석동, 서울 면목동·가리봉동·무악동 일대를 취재해 난쏘공을 썼다. 동일방직 사건 실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면목동에서 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살아 있는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에 박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서 난쏘공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진 적도 있다. 악덕 기업인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한 논의를 이 소설이 촉발한 것이다.

난쏘공 작가 조세희는 벌써 몇 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다. 지난달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 내가 아주 안 좋아 아무도 못 만나요. 나중에 나아지면 만나기로 해요"라고 힘겹게 말했다. 난쏘공은 그동안 100만부 넘게 팔렸다.

쇄를 거듭해 지난 6월 기준으로 5판287쇄를 찍었다. 1980~90년대 대학생들이 교과서처럼 읽으며 공부한 소설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됐고, 대입 수학능력시험에도 나왔다.

난쏘공 이후 조세희는 늘 우리 시대의 '난장이' 곁에 있었다. 그는 "우리 시대 어느 아이 하나가 배고파 우는데 그것을 놔두는 것도 폭력"이라고 했다. '난장이'가 꿈꾸던 '모두가 일자리를 얻고, 일한 만큼의 대우를 받는 그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작가 조세희가 전하려는 메시지다.

/글 =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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