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43]노동자 문학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거리로 내몰린 여공들의 '외침'… 무대에 오르다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4-11-20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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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물사건 등 동일방직 해고사태 다뤄
대학생들 권유에 연극으로 '투쟁'
대본은 해직자 석정남씨 일기장 바탕
당시 제적생 박우섭 남구청장 집필
노동자들이 살 붙여 능동적 의사표현
분노·동지애, 민주주의사회 기틀로


1978년 9월 22일 오후 7시30분 동일방직 해고근로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서울기독교회관에서 20대 초반의 여공 10여 명이 수줍게 무대에 올랐다. 인천 동일방직 해고사태를 다룬 연극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가 초연되던 순간이다.

여공들은 긴장한 나머지 대사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순서를 헷갈려 앞뒤가 뒤바뀌기도 했다. 같은 해 2월 21일 동일방직 회사 측이 노동조합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여공들에게 똥물을 뿌린 '동일방직 똥물사건'이 재연되자 무대에 오른 여공들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해설자:겨우 달아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여공에게까지 똥걸레를 휘둘렀습니다. 그래도 직성이 안풀려 달아나는 여공에게 똥통을 머리에 뒤집어 씌웠습니다.

여공3:경찰 아저씨 도와주세요!
경찰3:야이 쌍년아! 입닥쳐! 있다가 말릴거야(똥을 뒤집어 쓴 그 여공만 무대에 남고 모두 퇴장한다)
여공3: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여공2:어머니!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5막1장 中>
여공들의 울부짖음에 관객석도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됐고, 무대에 올려진 현수막을 떼어 들고 너나 할 것 없이 "노동 삼권을 보장하라! 똥을 먹고 살 순 없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공연장이 시위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변을 감시 중이던 100여 명의 경찰은 소란이 나자 회관으로 난입해 관련자를 무차별 폭행하고 연행했다. 5막 16장의 이 연극은 이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거리로 내몰린 여공들이 왜 무대에 올랐던 것일까.

36년 전 그날 연극무대에 오른 동일방직 해직노동자 석정남(58·여)씨를 지난 10일 충청북도 증평군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석씨가 동일방직에 다니면서 쓴 일기장은 당시 잡지 월간 '대화'에 소개되면서 이 연극 대본의 바탕이 됐다.

1975년 3월 어느날 충청북도 충주의 한 시골마을에 살던 스무 살 석씨는 병든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친구가 있는 인천으로 무작정 왔다. 석씨가 친구의 소개로 입사하게 된 곳은 인천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공장 '동일방직'이었다. 이 공장은 1934년 일제강점기 '도요오(東洋)방적'에서 출발했다.

이때만해도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했던 소녀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공장뿐이었다. 공장의 전체 직원 1천300여 명 중 1천200여 명이 여자였다. 석씨는 "심지어 나이 어린 소녀들조차 아는 언니의 이름을 빌려 취업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인천시교육청 통계자료를 보면 2013년 인천지역 고등학교 여자 졸업생 1만6천932명 중 기계조작·조립분야로 취직한 학생은 376명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니 중고생 어린 나이에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힘든 공장 막노동을 한다는 것은 먼 나라 얘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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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 사측이 뿌린 똥물을 뒤집어쓴 여공들의 모습.  출처/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공장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하루 3교대의 고된 작업에 졸다가 실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반장과 조장, 담임의 호통이 이어졌다. 그래도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뎠다. 그땐 그렇게 일하다가 좋은 남자 만나 시집만 잘 가면 되는 줄 알았다.

여공1:(실을 묶다가 여공2를 보고 꼬집는다) 얘, 졸지 마. 아직 새벽 5시가 되려면 멀었는데.
여공2:응. (놀라며)
여공3:얘, 빨리 틀을 살려. 조장한테 들키면 또 야단난다.
여공1:아까 담임이 지나가면서 우리를 잔뜩 노려보고 가더라 얘. 전에는 하루에 한 번 정도 들리던 사람이 요새 몇 번씩 지나가니 조심해.
여공3:그래. 조장한테 걸리는 건 약과야. 부서를 이동시키던지 면을 빼는 자리로 쫓겨나.
여공2:(일을 하다 말고 잠을 쫓으려고 고개를 흔든다) 언니 자꾸 졸음이오니 어떡하지. 지금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올 수 없을까?<2막1장 공장생활 中>
석씨는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을 일기장에 남겼다. 그것이 희곡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의 단초가 될 줄 '스무 살 정남'은 몰랐다.

"공장 들어가고 어려울 땐 일기가 하나의 위안이었어요. 당시 힘들었던 하루를 푸념하고 희망을 일기장에 썼던 거예요. 저녁에 '그 짓'을 하고 나니까 좀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일기에 멋도 부려보고, 슬픈 척도 해보고…. 일기는 내 친구였어요."

석정남 씨는 해직사태 이후 인천의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 서른 살 무렵 고향 충청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의 '동지'들은 30년 넘게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석씨와의 인터뷰 자리에는 동일방직에서 만난 오랜 친구 안순애씨와 김영순씨도 함께 나왔다.

한꺼번에 3명의 동일방직 여공들을 만나게 될 줄은 미처 기대하지도 않았다. 김영순 씨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연극 무대에 올랐던 얘기를 계속했다. 여럿이 하는 이야기는 훨씬 더 입체적이게 마련이어서 셋이 늘어놓은 연극 얘기는 마치 당시 무대 위의 상황을 펼쳐보이는 듯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똥물사건 직후인 1978년 3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장에서 시위를 벌인 뒤,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이어갔다. 이들이 회사의 복귀 명령을 거부하자 회사에는 석씨를 비롯한 124명의 해고자 명단이 대문짝 만하게 나붙었다.

안 씨는 "우리가 끝까지 싸웠던 것은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끈끈한 동지애가 더 큰 이유였다"며 "시골에서 올라와 고생한 언니·동생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동일방직 해직노동자들의 '연극'이 시작되었다.

석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백수가 되니까 결속력도 떨어지고 매일 술이나 마시게 되고 나태해지던 참에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동일방직 문제를 다룬 연극을 하자고 찾아왔다"며 "동일방직 사건을 외부에 알리고 나태해진 마음을 다잡는데 제격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응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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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은 당시 서울대 제적생으로 탈춤과 마당극 등을 하던 속칭 '딴따라 패'에 있던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이 썼다. 석씨는 해설자, 안씨는 새마을부장, 김씨는 여공 역을 맡았고, 연습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이야기 했다.

여공들이 나누는 대화가 대본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 자체로 훌륭한 '노동자 문학'이 됐다. 작가의 의도나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노동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우섭 구청장은 "석정남의 일기를 기본으로 1차 대본을 만들고, 연습을 하는 중간에 노동자들이 직접 상황을 만들고 대본에 살을 붙였다"며 "이 연극은 감동적인 노동문학이기도 했지만, 데모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사표현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이 체포한 여공들에게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주동자'의 이름을 댈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이 주동자였고, 스스로 연극을 만든 주체였기 때문이다.

희곡 연구자 윤진현 박사는 "노동자가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표현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방식을 담는 게 진짜 노동문학이다"라며 "이 희곡은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문학을 통해 삶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갔는지가 담겨 있어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

꽃다운 청춘을 공장에서 보내다 똥물까지 뒤집어 쓴 그때 그 동일방직 여공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연극은 '동일방직 문제'에 초점을 맞췄지만,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70년대 후반 유신정권 아래 벌어진 자유의 억압과 노동 착취 등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외침이기도 했다.

'민주화'라는 거창한 구호는 몰랐더라도 바로 옆 언니·동생이 부당한 일을 당한데 대한 분노와 동지애가 민주주의사회를 만들어가는 기틀이 된 것이다.

한때 1천명이 넘는 직원이 상주했던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지금은 공장 자동화와 생산설비 타 지역 이전으로 천을 짜는 직포라인 45명의 근로자만 남아 있다. 회사 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공장 이전설마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124명의 해직 여공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무대 위에서 그때를 이야기 한다.

당시 복직투쟁을 이끌었던 이총각(66·여) 전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은 "우리가 옳은 일에 젊음을 투자했고,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며 "지금도 만족하고 살면 변화는 절대 없다. 변화를 위해선 그만큼의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 김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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