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저무는 한 해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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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경쟁에서 빠른 디지털족과 뒤처지는 아날로그족
불안하다는 배회족… 행복하지 않다는 질주족
짧아지는 젊음의 그림자… 소중한건 오직 지금뿐


어느덧 12월이다.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문다. 거리에 구세군 종소리가 들리고 성탄트리도 반짝인다. 예전에 그 많던 크리스마스카드와 캐럴송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구두닦이 소년과 엿장수 아저씨와 연하장 그려 팔던 예쁜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가수 이선희가 부른 '아, 옛날이여'마저 노래방기기나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시대. 디지털기기 속으로 들어간 게 어디 한 둘이랴. 세상 참 빠르게 변한다. 손 안의 스마트폰 속으로 세상은 몸을 꾸기며 들어간다. 잠깐 사이에 세상은 천지개벽하고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변화의 속도가 가속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식총량은 73일마다 두배씩 늘어난다는 보고도 있다. 너무 빠르다. 디지털종족들은 생존가능성이 높지만 아날로그종족들은 생존경쟁에서 뒤처지게 마련이란다.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의 논리가 디지털 진화론을 만든다.

그래도 오늘은 잠시 아날로그식 삶이 그립기도 하다. 회룡고조(回龍顧祖). 먼 길 달려온 산줄기가 제 온 곳 돌아보듯 잠시 지나온 시간 생각해 본다. 조금 있으면 언론들은 올해의 10대뉴스를 경쟁하듯 발표할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시간 열차속에 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나간 사건의 풍경들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내게서 떠나 허공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럴수록 '오직 지금'만이 존재의 빛나는 전제임이 절실해진다. 연말이라는 추상적 '끝'이 안개 진군하듯 다가오는 시간에.



가만히 내게 물어보니 내 삶의 진짜 주인은 속도로구나. 무리지어 달리는 말처럼 나 역시 그 대열에 끼어 질주해 왔지. 시간의 바람은 무서운 속도로 휙휙 지나가고 붙잡아달라는 손들 이루 다 잡을 수 없었네. 그렇게 됐어. 갑오년 올 한해, 바쁘다는 말 입에 달고 살아온 건 분명하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이 땅의 허망한 죽음들이며 숨가쁜 삶들은 망각의 저녁 강 속으로 점점 가라앉아 가는구나. 세월호의 꽃다운 생명들, 분신한 아파트 경비원, 고독사한 옆집 할아버지, 직장 구하지 못한 늙은 청년들, 거리에 어슬렁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유령들.

그래도 좋아, 나도 좀 바빠 봤으면. 노동열차를 놓친 '배회족'들은 오늘 저녁 노을이 더욱 검붉고 처량하다. 그들 식탁엔 매번 불안과 초조가 올라오지. 질주해도 좋아. 난 지속적인 속도가 필요해. 그들은 의자에 앉아서 가상의 속도를 꿈꾸며 2천원이나 오른 담뱃값 걱정을 잠시 잊는다.

탑승에 성공한 '질주족'도 행복하지 않다고 투덜대기는 마찬가지다. 나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목표와 성과의 기관차에 올라타 전력질주만 했을 뿐 잠든 아내 흰 머릿결 이제야 세어본다. 오늘도 늦네요, 카톡 문자만 몇 번이던가. '해마다 해마다 꽃은 피어 그 모습 비슷도 하건만, 해마다 해마다 사람의 모습은 같지가 않구나(年年世世花相似 世世年年人不同).' 세월의 무상함과 나이 드는 서글픔을 노래하는 당시(唐詩)의 빛나는 명구 비로소 실감하니, 내 근본의 팔할이 시간이란 걸 불현듯 알겠구나. 해서, 저무는 해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시간을 스케치 해보는 것이다.

시간은 정직하다. 배회족이건 질주족이건 그들 몫만큼의 시간은 정해져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남은 인생에서 제일 젊다. 앞으로는 젊음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진다. 그러니 소중한 것은 오직 지금뿐. 그림자가 몽당연필처럼 짧아져 스러져 가는데 지나온 기차역에서 만나지 못한 그녀를 애달파한들 무엇하리. 여기 3차원 우주에서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 오직 지금만이 존재의 전부. 배회족도 질주족도 속도와 싸우는 게 아니라 오직 지금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이 행복'이라는 아주 매력적이고 실제적인 행복의 정의이자 실현이다. 한 해가 저문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자.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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