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신년특집

[되돌아본 광복70·경인70]비통의 70, 슬픔의 70, 공포의 70, 환희의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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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 올해는 광복을 맞은지 7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또한 광복과 함께 1945년 대중일보 창간을 시작으로 경인일보가 70년의 역사를 걸어 온 해이기도 하다. 고난과 환희의 70년을 맞아 대한민국과 경기도가 걸어온 지난 길을 되돌아보며 이들과 함께 경인일보가 호흡한 역사의 세월을 기록해본다. ┃편집자주

■비통의 70

南北 분단의 상처, 경기·인천은 더 아팠다



서해5도, 북한 도발·포격 끊이지 않아
남북 화해무드에도 언제나 '긴장 상태'
38선 안은 경기북부도 北위협에 노출

광복 70년, 우리는 대부분의 세월을 '분단' 상태로 살았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정치 논리에 따라 극단적인 분쟁을 겪었고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경인지역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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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8월 20일자 1면. 사상 첫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38선을 안은 경기북부

지난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파주시 적성면의 작은 마을은 이때부터 지금껏 분단을 상징하는 판문점으로 대변됐다. 1960년대 극한의 대립을 하던 남북은 70년대 들어 판문점서 남북적십자회담, 7·4공동성명 등 판문점에서 만나 화해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76년 8월, 북한군이 판문점 내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2명을 도끼로 내려쳐 살해한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다.

경인일보(당시 경기신문)는 1면 톱으로 '사전에 계획된 만행... 판문점 도발, 인간이면 생각도 못할 잔혹'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고, 이후에도 '북괴' 등의 표현을 쓴다. 1960~70년대 반공 여론은 최고조였다.

앞서 1974년 11월 연천군 정남면에서 제1땅굴이, 1978년 10월 파주시 장단면에서 제3땅굴이 발견되는 등 38선이 걸쳐 있는 경기도 북부지역은 언제나 북한의 도발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화해무드에도 서해 5도는 '초긴장'

서해 5도는 남북 화해무드 속에도 언제나 시한폭탄 같은 곳이었다.

1999년 6월 15일, 우리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 7척이 해군을 공격, 15분 가량 교전이 일어났다. 해군은 1차 연평해전 당시 완승을 거뒀으며, 경인일보는 1면을 통해 '우리 해군 믿음직' 등의 기사로 역사적 승리를 기록했다. 3년 뒤, 2002월드컵 개최 등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2차 연평해전이 벌어져 안타깝게도 고 윤영하 소령 등 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해상 북방한계선(NLL)을 둔 서해 5도 지역에서의 교전은 계속돼 수많은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2010년 3월 백령도 해상에서는 천안함이 폭침돼 해군 40명이 숨졌고, 같은해 11월에는 연평도에 북한의 포격이 가해져 끝까지 맞서던 서정우 하사 등 해병대원 2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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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장갑차 사건' 관련 시위.
#분단이 남긴 것, 미군

전쟁은 미군을 남겼다. 경인지역은 경기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미군기지가 들어서 지금껏 주민 갈등의 씨앗으로 남아있다.

동두천의 경우 미2사단이 잔류키로 해 현재 주민 반발이 극심한 상황이며, 평택에서는 지난 2005년 미군기지 확장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 수많은 시민과 경찰이 다쳤다.

미군이 주둔하는 곳에는 이른바 '기지촌'도 형성됐다. 1960~70년대 생긴 기지촌에는 가난에 시달리던 젊은 여성들이 몰려들어 '양공주'라는 비난에도 꿋꿋이 버텼고, 이들은 이제 쪽방에 머물러 고독하게 살고 있다.
경인일보는 2007년 5월 '기지촌 할머니들 고단한 삶'이라는 기획보도를 통해 이들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미군 범죄가 발생하면서 나타난 반미감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도 있었다. 지난 2002년 6월, 양주에서 갓길을 걷던 신효순(14), 심미선(14)양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지면서 SOFA 개정을 요구하는 범국민 촛불시위가 일어났다.

월드컵 열기가 절정에 이르러 다른 언론은 해당 사건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경인일보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심층 취재보도'를 통해 2002년 한국기자상까지 거머쥐었다.

■슬픔의 70

국민들 울린 참사, 한 발 먼저 현장 나선 경인일보

씨랜드 참사, 기획 통해 깊이있는 보도
57명 청소년 숨진 인천 호프집 화재땐
청소년보호법 악용 세태 가감없이 고발


화성 씨랜드 화재, 인천 호프집 화재, 세월호 사고까지 경인지역은 대규모 참사가 끊이질 않았다. 두번 다시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인재까지, 국민들을 울린 사건사고들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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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7월1일자 1면. 화성 씨랜드 참사.
#예견된 참사의 현장

지난 1995년 8월 21일, 용인에 위치한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 학생들의 방화로 화재가 발생해 37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가 발생했다. 이 학원은 윤락소녀, 가출소녀, 고아 등을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경인일보는 이날 "출입구 잠겨 불길 속 '살려달라'", "내 딸 어디있나… '발동동'"이란 헤드라인을 달아 참담한 사고현장의 실상을 알렸다.

1999년 6월30일은 그야말로 악몽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의 한 청소년 수련시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총 23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
이른바 '씨랜드 참사'로 불린 이 사건은 어른들의 욕심이 아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안타까운 사건으로 기록됐다.

가연성 샌드위치 패널로 불법 건축돼 불이 커질수록 맹독성 가스를 뿜어 사고를 키웠으며, 아이들을 인솔해야 할 교사들은 삼겹살과 소주를 먹고 거나하게 취해 잠들어 있어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인일보는 '방치된 안전, 죽음의 캠프 수련시설'이라는 기획을 통해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참변을 당한 쌍둥이 자매의 사연 등을 자세히 보도했고, 2011년에는 '씨랜드 참사 잊었나… 또 둥지튼 불법시설' 특종보도를 통해 십수년이 지난 뒤에도 버젓이 무허가 불법영업하는 시설을 사회에 고발했다.

1999년 10월 30일 인천시 중구 인현동의 한 호프집에서 화재가 발생, 57명의 청소년이 목숨을 잃었다. 업주는 학생들에게 술을 팔며 행여 도망갈까 비상구까지 잠가뒀고, 업주로부터 뒷돈을 받은 공무원이 이같은 불법 행위를 눈감아 발생한 전형적인 인재였다.

경인일보는 '호프집 참사, 이것이 문제' 기획을 통해 허울뿐인 청소년보호법과 이를 악용하는 어른들의 이기심을 가감없이 보도해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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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호프집 화재.
#멈출 줄 모르는 인재(人災)

2001년 5월엔 광주시 송정동의 예지학원 건물에서 담뱃불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수업을 받던 학생 중 10명이 숨졌다. 학원장은 창고건물을 불법 용도 변경해 업무상 과실치사로 구속됐고 이를 눈감아 주던 공무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2008년 이천에서는 2건의 대형참사로 48명이 목숨을 잃었다. 1월엔 호법면의 냉동물류창고에서 불이 나 우레탄 가스에 의해 인부 40명이 목숨을 잃었고 12월엔 마장면의 한 물류창고에서 샌드위치 패널에 불이 붙으면서 인부 8명이 숨졌다.

그리고, 지난해 4월 16일. 대한민국의 모든 병폐가 모여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낸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오열하는 유가족 앞에 해경은 무능했고 선장은 수학여행에 들뜬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속옷바람으로 도주했다.

다시는 이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고작 6개월 뒤 성남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가 발생한다. 유명 가수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렸던 시민들은 환풍구에 올라섰고, 하중을 이기지 못한 덮개가 무너져 27명이 20m 아래로 추락, 16명이 숨졌다. 대한민국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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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70

강력사건 전말 이끌어낸 신속보도·집요한 취재력

화성 연쇄살인사건 잇달아 취재·보도
당시 기자, 영화 '살인의 추억' 모델로
오대양 사건땐 한달 넘게 특종 쏟아내

전국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한 강력사건의 중심에는 경인일보의 신속한 보도와 사건의 전말을 이끌어내는 집요한 취재력이 큰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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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두 사건


1975년 가을,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 터진다. 그해 8월 13일부터 55일동안 경기, 서울, 전남을 오가며 9차례에 걸쳐 17명을 살해한 김대두가 검거되면서 전말이 드러난 것. 

폭력 전과 2범이던 김대두는 전남 광산군 외딴 집에서 주인 안모씨를 살해한 것을 시작, 평택·양주·시흥·수원과 전남 무안, 서울 등지를 돌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경인일보는 당시 1면을 통해 '외딴집 일가 4명 피살'과 범인의 몽타주 등을 보도하며 진실에 다가간다. 

# 화성 연쇄살인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아직도 미궁 속이다. 1986년 화성에서 벌거벗겨진 여성시신이 발견됐고, 경찰의 총력 수사에도 불구, 화성·수원 등 지역을 넓혀가며 같은 수법의 살인이 계속됐다. 

1986년 9월 19일 안녕리의 70대 노인이 살해된 것을 시작으로, 4년 7개월동안 10회에 걸쳐 여성 10명이 강간·살해됐다. 연인원 200여만명 경찰이 동원되고 용의자만 3천여명이 조사를 받았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고, 공소시효까지 만료됐다.

당시 경인일보는 '선보러 집나갔던 처녀 수로에서 알몸 변시로'를 시작으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잇달아 보도했고 이후 사건은 '살인의 추억'으로 영화화돼 당시 이 사건을 취재했던 경인일보 기자가 영화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 오대양 사건

1987년 8월 29일 오후, 경인일보 편집국에 걸려온 전화 한통. '용인군 남사면의 공예품 회사 오대양 공장에서 다수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주재기자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경인일보 기자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후 기자들과 경찰이 속속 모여들었다. 현장에는 32구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이들은 사장 박순자와 자녀·직원들이었다. 경인일보는 8월30일 일요일자 호외로 '허황된 꿈이 부른 광란극' 등의 기사를 내보냈고 한달여동안 특종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자의에 의한 집단 자살'로 종결, 아직까지도 의문 투성이로 남겨져 있다.

# 강호순 사건

죄책감이 없고 슬픔의 감정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자). 전문가들은 노래방 도우미 3명, 회사원 1명, 주부 1명, 여대생 2명, 공무원 1명과 자신의 장모와 처마저 살해한 강호순이 사이코패스라고 진단했다.

당시 경인일보는 '전처 사망 방화 가능성에 무게' 등의 보도로 네번째 부인 사망과 잇단 실종 사건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 강력범죄의 피의자가 죄를 저질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경우 얼굴을 공개할 수 있는 법령 또한 신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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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원춘 사건


경찰의 부실대응 논란을 일으킨 이 사건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인 오원춘이 2012년 4월 1일 수원 팔달구 지동의 자신의 집 앞을 지나던 20대 여성을 강제로 집에 데려가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한 사건이다.

하지만 오원춘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당시 피해 여성이 납치된 이후 경찰에 전화로 구조요청을 했지만 경찰이 늑장 출동해 결국 사망하는 사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같은 '부실수사' 논란으로 당시 경찰청장이던 조현오씨가 청장직을 사퇴하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또한 오원춘의 시체훼손 방식이 잔인해 항간에 '장기밀매', '인육' 등의 끔찍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 박춘봉 사건

지난해 12월 4일 수원 팔달산 등산로에서 '제2의 오원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기가 없는 상반신 토막 시신이 발견됐다. 시민의 제보가 없었다면 미궁에 빠질뻔 했던 박춘봉 사건은 치정에 의한 범죄로 밝혀졌지만 수법이 잔인해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또한 경인일보는 '박춘봉 검거'부터 '박춘봉 출입국 기록 없다'는 단독보도를 통해 밀항을 통해 불법으로 한국을 드나드는 불법체류자 실태를 낱낱이 폭로했고, 출입국 관리의 허술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환희의 70

온 국민에 희망 선물한 경기도 출신 스포츠스타

화성 논바닥서 공차던 차범근 獨 평정
수원 출신 박지성, 맨유 거쳐 성공신화
김연아, 세계대회 휩쓸며 피겨퀸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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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스포츠스타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 최초 유럽축구에 진출한 차범근부터, 영원한 주장 박지성, 세계가 인정한 피겨스케이팅의 여왕 김연아 까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를 배출했다. 


# 축구영웅 차범근

경기도의 한 시골동네에서 태어나 논바닥에서 공을 차다가도 일을 하러가야 했던 소년은 훗날 국내 최초로 유럽축구리그 중 하나인 독일 분데스리가에 입단해 한국을 널리 알렸다.

1953년 화성군 송산리에서 태어난 차범근은 1979년부터 독일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98 및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동아시아 작은 나라의 선수가 최초로 유럽구단에 입단했다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차범근은 분데리가에서 활약한 10년동안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다. 차범근이 경기 중 받은 옐로카드는 단 한 장으로, 그가 기록한 골만 98골이다. 

# 영원한 주장 박지성

세계 최고 축구구단으로 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 곳에 아시아인 최초로 입단, 최고의 선수로 경기장을 누빈 박지성은 수원에서 태어났다. 축구명문고로 유명한 수원공고를 거쳐 명지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지만, 당시만 해도 박지성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선수였다. 

하지만 지칠줄 모르는 강인한 체력과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성실함을 일찌감치 알아본 거스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어, 그는 마침내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됐다. 

2002월드컵을 4강으로 이끈 그는 이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번에 입단해 좋은 성적을 거뒀고, 유럽무대 진출 3년 만인 2005년 6월 축구 본고장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그는 이른바 꿈의 구단인 '맨유' 선수로, 주장으로 7년여간 경기장을 뛰어 다녀 총 205경기 출전, 통산 27득점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박지성의 꿈나무시절부터 은퇴식까지 함께 한 경인일보는 지난 5월 15일 그의 은퇴식을 기록하며 '한계 몰랐던 두개의 심장, 인생 후반전 선언' 기사를 보도, 그의 인생을 응원했다.

# 피겨여왕, 김연아

'국민들은 행복했습니다.'

김연아 때문에 울고 웃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김연아는 대한민국에 행복을 전해줬다. 지난 2010년 2월 26일 불모지로만 여겼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당당하게 금메달을 거머쥔 김연아는 1990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6살, 어머니 손을 잡고 우연히 찾은 과천 실내 빙상장에서 그녀의 겨울왕국은 시작됐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2004년 헝가리에서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6년 ISU 그랑프리 시리즈 스케이트 캐나다로 시니어무대에 데뷔한 김연아는 같은 달에 열린 트로피에릭 봉파르에서 시니어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9년 3월에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과 동시에 여자선수 최초 200점대를 넘기는 신기록을 세웠다. 

특히 대망의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는 228.56이라는 최고기록을 스스로 갱신하며 아시아 최초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두번째 도전인 2014 소치올림픽에 참가해 환상적인 무대를 선사, 금메달같은 은메달을 획득하며 전세계인에게 '유나퀸'의 건재를 알리기도 했다.

또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는 동계 올림픽, 세계 선수권, 4대륙 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 등 세계 4대 국제대회에서 모두 우승해 그랜드 슬램을 달성, 명실상부 피겨여왕임을 전세계에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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