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연 영화평론가 |
강제규 감독이 돌아왔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로 한국영화사의 흥행기록을 다시 쓴 그가 가지고 온 영화는 노년의 슬픔을 다룬 최루성 영화 ‘장수상회’다. 그런가 하면 이병헌도 돌아왔다.
배우 이병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힘내세요, 병헌씨’로 독특한 잉여적 유머감각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던 젊은 감독 이병헌이다. 그의 첫 상업영화 데뷔작은 하릴없는 청춘 잉여들의 섹스코미디 ‘스물’이다. 중견 흥행감독과 젊은 신인감독의 작품이 한 시기에 나란히 스크린에 걸린 것이다.
장수상회는 노년의 로맨스와 비애를 장르적인 연출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스물은 막 스물이 된 세 친구의 좌충우돌 연애담이다. 몸은 성인이 되었으나 아직 섹스와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젊은 남자들이 사랑과 꿈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장수상회가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노년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면, 스물은 앞날이 창창한 청년의 섹스코미디를 담고 있다.
상반된 두 작품이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면 다소 과장되고 비약적인 주장일지 모른다. 완성도에 대한 평가나 취향의 호불호에 대한 의견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재개발’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어, 두 영화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각 세대의 어떤 시각을 대변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장수상회는 본의 아니게 재개발을 방해하던 노인이 마지막 순간 재개발이 가능하도록 돕는다는 큰 이야기 속에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미담을 집어넣었다. 반면 스물에서 세 친구의 놀이터인 ‘소소반점’은 떡하니 재개발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연애에 집착하던 청년들이 친구인 소민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소소반점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본의 아니게 싸움에 휘말린다. 본의 아니게 분란을 일으키다가 개과천선(?)하는 인물과 본의 아니게 관심 없던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 인물 설정은 영화가 현실을 바라보는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재개발의 옳고 그름을 쉽게 단정 짓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부모로 부터 물려받을 게 있는 사람과 물려받을 게 없는 사람이 재개발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대하는 마음도 다를 것이다.
익숙한 것을 지켜나갈 것 같던 노인은 재개발을 찬성하고 재개발에 찬성할 것 같은 젊은이들이 오히려 반대한다. 아마 이것이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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