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대한민국

이백철

발행일 2015-05-18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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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철 경기대 교정보호과 교수
사회 병폐가 한계에 달하면
스스로 정화돼 발전단계 진입
우리사회도 하루빨리
남탓·정부탓·증오의 늪에서
벗어나 타인을 배려하고
품격있는 공동체되길 기대


일본 여행을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택시 안에서 유치원생 여자아이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어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는데 신호등이 바뀔 무렵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횡단보도를 다 건넌 그 아이가 택시를 향해 돌아서더니 머리 숙여 인사하고 다시 돌아서 걸어가더라는 것이다. 아베 정부의 극우 정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이러한 풀뿌리 일본인들의 시민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만명이 훨씬 넘는 희생자를 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현장을 취재한 외신기자들은 일본열도는 흔들렸지만, 일본인들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일본인의 시민의식은 인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재기와 약탈이 없었음은 물론 며칠을 굶고 노숙해도 정부 관계자들의 멱살을 잡거나 항의하는 유가족을 찾아볼 수 없었고 죽음 앞에서도 서로 돕고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최근 주변에서 세상이 척박하고 무섭기까지 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아이가 아이를 낳아 내다 버리고,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에게 매춘을 시키는가 하면 자식들이 공모해 부모를 살해한다. 남몰래 녹취해 상대를 겁박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익명의 탈을 쓰고 무자비한 댓글로 상대를 몰락시키는 행태 또한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정치계든 언론계든 먹잇감이 한 건 등장하면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파헤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어디에서도 상대에 대해 선한 배려와 의연한 평정심과 절제 있는 균형 감각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사회가 어찌하여 이토록 척박하고 품격이 없는 세상으로 변해 버린 것일까?

언젠가 내가 알고 지냈던 외국 친구들은 한국 사회를 일종의 경애 대상으로 보곤 했다. 유교적 전통이 살아있어 효를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하며 가족애가 살아있는 공동체임을 부러워했다. 알코올 중독자 비율이 높지 않은 현상까지도 한국인들의 절제하는 기품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기인한다는 착시까지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OECD국가 중 자살률과 이혼율이 가장 높고 출산율이 최하위라는 사실을 지금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언어와 인종이 같고 종교적인 분쟁마저 없는 데에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이며, 분단된 반쪽 세상마저 동서로 나뉘어 상대편을 증오하고 권력투쟁을 일삼는 실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실체도 없었던 광우병으로 온 나라가 촛불시위로 몸살을 앓고, 불행한 세월호 참사가 정치적인 투쟁 수단으로 변질되는 현실은 또한 어떻게 평가할까?

그 이유로는 수많은 요인이 거론돼 왔다. 그러나 그 요인들은 남북의 대치상황,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여건, 부족한 자원과 과도한 인구밀도, 급속한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에 따른 양극화, 지나친 경쟁 위주의 입시제도와 전인교육의 부실 등 참으로 누구도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이다.

더더욱 최근 언론을 뒤덮고 있는 가학적 자살사건들과 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면모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조급함과 척박함이 한계를 넘어 절망감을 주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행히 조금은 위로가 되는 주장이 있다. 세상사는 어느 곳에서나 어느 정도의 병적인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며, 병적인 현상도 일정 수준까지는 사회 진보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병폐가 한계 상황에까지 도달하면 그 사회구성원들이 자생적으로 정화의 길을 찾아 도리어 진보와 발전의 단계로 접어든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 사회도 하루빨리 남 탓, 정부 탓, 그리고 증오의 늪에서 벗어나 무던히 모두가 제 자리를 지키고 진정으로 타인들을 배려하는 품격 있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실제로 역경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진입했으며 저 지구 건너편까지 뜨거운 한류열풍을 일으킨 민족임을 상기한다면 우리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치켜세울 여지는 여전히 충분하게 남아있지 않은가?

/이백철 경기대 교정보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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