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꽃 이야기

윤재웅

발행일 2015-05-29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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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신라시대 연인의 애절한 사랑에 등장한 꽃
젊은 예술가들 전통이야기 콘텐츠화 했으면…
정성 다해 투자한다면 놀라운 미래 열릴것


바람이다. 바람 분다. 남풍 동풍 훈풍 분다. 그 바람 빗겨 타고 종달새 쨋재거리고, 우쭐우쭐 청보리는 제 허리통 부끄럽다. 우람한 산엣총각, 수줍은 들색시 썸타는 5월. 햇살은 서글서글, 따끈한 듯 선선하다. 태아들은 그래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생명이다. 숨결이다. 가슴 뛰고…, 피는 잘 돌고…, 마음은 박자도 없이 퉁기쳐 달아나는 꿩 새끼들 기분이다. 다들 몰라도 장미는 그걸 아는 눈치다. 산에도 들에도 거리에도 담장 안에서도, 장미는 별까지 자라고 싶다.

꽃피는 건 좋은 일이다. 어머니 배 속 생명의 태동처럼 아름다운 일이다. 보라. 유전자를 복제해서 생명을 영속시키는 게 사랑의 생물학적 정의다. 바람이 선들 불어 아기 발가락 꼬물거리면 지상의 모든 장미의 눈들은 나비처럼 날아올라 서로의 짝을 찾는다.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이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5월엔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부처님 오신 날이 몰려 있어서 꽃구경을 자주한 편이다. 카네이션이며 장미며 작약꽃 송이송이들이 지하철 승객들처럼 어디에서 실려 왔다 어딘가로 실려 가고, 꽃이 있던 그 자리엔 그 빛깔과 향기의 기억만 점차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5월이 가는 동안 간절한 옛날 꽃이야기 하나 떠올라 꽃 사라진 그 자리를 채운다. 정보화 사회 다음 사회는 이야기와 감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는데 우리의 옛날 꽃 이야기는 여기에 얼마나 어울리는 콘텐츠일지 기대된다.

신라사람 최항은 자(字)를 석남(石南)이라 한다. 애인이 있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죽었다. 죽은 지 이레 만에 그녀의 집에 찾아가 ‘이제 부모 반대가 없으니 뜻을 이루자’ 말하고 석남꽃 가지를 나누어 머리에 꽂은 채 항의 집으로 함께 오게 되었다. 항이 자기 집 담을 넘어갔는데 동이 틀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집안사람이 아침에 나와 보니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이상히 여겨 물으니 항이 함께 가자 해서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항이 벌써 죽은 지 여드레 되어 오늘 장사지낸다 하니 여인이 믿지 못해 사람들과 함께 관을 열어보게 되었다. 과연 여인의 말대로 항의 머리에 석남꽃이 꽂혀 있었고 벗겨져 있던 신발은 밤새 어디를 돌아다니다 온 듯 신겨져 있었다. 항이 죽은 줄 그때서야 알게 된 여인이 기막혀 죽으려 할 때, 그 소리의 기미에 놀라 다시 살아난 항. 정성 들여 여인을 살려내어서는 한 30년 함께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연인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왜 꽃이 등장했을까? 신라 시대의 꽃은 오늘날처럼 감사의 선물로 주고받는 마음의 대체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것은 기념품이기보다 오히려 신성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겨레의 집단 무의식에 작동하는 ‘부활 프로젝트’의 핵심 소품이었다. 우리 민족서사의 시원인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서천 꽃밭의 그 꽃이 죽은 이를 살리는 매력적인 화소(話素)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것은 석남꽃 이어도 좋고 영산홍이어도 좋으며 도라지꽃이어도 무방하다. 꽃은 식물들의 종족번식 프로그램이요 사랑의 징표인 동시에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에 열매를 제공해주는 보살의 화신체 아닌가. 꽃의 이런 무의식 속에 수억 년을 이어온 생명의 간절한 추구, 사랑의 영속과 같은 형이상학이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신라사람 최항 만 이어서는 안 된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이런 전통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보편적 감화력을 가지는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일에 도전해 보았으면 싶다. 이야기에 정성을 투자하는 이에게 놀라운 미래가 열릴 것이다.

/윤재웅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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