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입김이 비명처럼 쏟아져 나온다. 산사태로 폐허가 된 집터에서 그의 몸부림은 절박하다. 집은 삶의 터전이기에, 무너진 것은 집뿐만이 아니다. 그의 삶 전체인지 모른다.
박정범 감독의 신작 ‘산다’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살다’도 ‘살자’도 아니다. 살다가 지닌 삶의 본질적 의미를 탐색하는 것도 아니고, ‘살자’가 품고 있는 저항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선동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이고 현상적인 우리 삶의 단면을 조명한다.
산다의 영어 제목 ‘alive’는 아직 생존해 있는 상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생존은 죽음이나 소멸, 침묵과 고요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산다는 꿈틀대고 몸부림치는 역동적 세계이다.
몸부림과 몸부림이 부딪칠 때 갈등과 모순을 빚는다. 욕망이 욕망을 부르고 분노가 분노를 낳는다. 절망과 좌절은 절벽처럼 높고 두텁다. 박정범 감독의 전작 ‘무산일기’가 그 갈등과 모순의 한가운데에서 외친 절규였다면 산다는 끈기있는 응시에 가깝다. 응시란 대면이고 마주함이다.
영화의 초반 임금을 떼어먹고 달아난 팀장 집의 문을 떼는 것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휑한 집에 관객을 몰아넣음으로써 자신의 응시에 동참하기를 요구한다. 세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은 그러한 응시의 시간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주인공 정철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돌아올지 모를 누나를 위해 조카와 함께 가로등을 단다. 높은 나무 끝에 매달려 등을 매달기 위해 애쓰는 그를 향해 조카가 좀 더 높이 달기를 요구한다. 그러자 정철은 ‘여기가 끝’이라고 답한다.
더 이상 올라갈 수는 없지만,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의 끝에 불을 밝힌다.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모두 별빛’이라는 명훈의 말처럼 그가 매단 것은 구차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밝힌 별빛인지 모른다. 영화는 관객에게 아부하기 급급한 영화들의 급류 속에서 영화의 삶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영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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