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영화로 읽는 역사

중년 아저씨들의 그랜드 투어

‘트립 투 이탈리아’ 2015년, 마이클 윈터버텀 감독
▲ 박신영 작가
▲ 박신영 작가
영국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실명으로 출연하는 영화다. 1965년생 동갑내기 아저씨 둘은 영국 시인 바이런과 셸리의 200년 전 발자취를 따라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6일간 바이런이 머물렀던 집, 셸리가 요트사고로 익사한 바다, 셸리를 화장한 해변, 로마에 있는 셸리의 묘지를 방문한다. 그동안 둘은 쉬지않고 먹고 떠들어댄다.

그들이 따라간 바이런의 여행은 ‘그랜드 투어’였다. 그랜드 투어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특히 영국의 상류층에서 유행한 유럽여행이다. 영국의 귀족이나 자본가 등 상류계급은 조기유학과 어학연수, 해외여행을 겸해서 자식을 유럽에 보냈다. 당시 영국은 해상권을 장악하고 식민지를 확대하여 나날이 부강해졌지만 실질적 문화대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과거 로마제국 변방의 촌뜨기라는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영국 상층 계급의 부모는 자식들이 세련된 문화와 유서깊은 역사를 현장에서 배워오길 원했다. 프랑스에서 에티켓을 배우고 이탈리아에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것이 기본 코스였다. 2~3년간의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귀국한 이들은 저서를 남겼다. 에드워드 기번은 1764년 로마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로마제국 쇠망사’를 썼다. 바이런은 장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를 써서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졌다.” 한편, 가난한 지식인들은 가정교사 자격으로 그랜드 투어에 동행하여 견문을 넓혔다. ‘리바이어던’의 토마스 홉스,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가 대표적이다. 그랜드 투어는 북유럽에도 유행했다. 그랜드 투어 경험을 알차게 이용한 영국 외 여행객으로는 ‘이탈리아 기행’을 쓴 독일의 괴테, 서유럽의 공장과 박물관, 병원, 조선소 등을 둘러 본 후 서구화 정책을 추진한 러시아의 표트르 1세가 유명하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여행을 많이 하는 영국인’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그랜드 투어는 영국인들에게 의미깊은 전통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묘사된 영국 중년 아저씨들의 여행은 전통적인 영국식 그랜드 투어답지 않다. 이들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도 이탈리아를 보고 말하지 않는다. ‘돌체 비타’, ‘대부’등 자신이 보았던 이탈리아 배경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자신들이 아는 배우들의 성대모사를 즐긴다. 앨라니스 모리셋의 반항적 노래인 ‘All I really want’를 크게 들으며 신나게 시작한 여행은 갈수록 무거워진다. 셸리의 죽음을 따라 가고, 폼페이 유적과 묘지를 방문하면서 그들은 죽음을 생각한다. 그들의 머릿속은 현실 문제로 꽉 차 있어서 그랜드 투어에서 새로 보고 듣고 배울 여유가 없다. 그래도 일탈을 꿈꾸며 ‘노팅힐’과 ‘로마의 휴일’의 결말을 비교해 보기도 하지만, 중년의 그들은 이미 바람직한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 후에는 얼른 가족과 통화해야 마음이 편하다.



가진 것과 아는 것이 너무 많은 나이의 여행이란 이런 것일까. 이제 늙은 제국 영국은 그랜드 투어를 할 필요가 없어서일까. 아름다운 풍경도, ‘먹방’도 자주 등장하는데 왜 이리도 영화가 쓸쓸할까. 아마도 나는 아직은 ‘전망 좋은 방’스타일의 이탈리아 여행에 더 끌리는 것 같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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