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선생의 풍수테마기행·25] 다시 돌아보는 사찰과 명당 <上>

해 하려는 기운 서린 땅 ‘대사찰의 몰락’ 불렀다

박상일 기자

발행일 2015-07-21 제9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985189_547052_5944
▲ 발굴된 양주 회암사지-1997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양주 회암사지는 왕궁의 구조를 인용한 건물지들이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산 좋고 물 좋은 신륵사
아늑한 산들에 둘러싸여 명예·권력 모여
앞쪽에 휘둘러 흐르는 남한강 ‘금상첨화’
아름다운 자연 어우러져 ‘천년고찰’ 명성

■옛 영광만 남은 고달사지·회암사지
골짜기 안쪽에 잡은 터 “이해 못할 선택”
결국 유학자들의 숭유억불로 인해 ‘폐사’
그나마 천보산 맥 받는 회암사 뒤늦게 빛


985189_547056_5944
당대의 고승들이 터를 잡았으나 풍수의 기운을 따라 각각 흥망성쇠가 갈렸으니, 쓸쓸히 터만 남은 대사찰(大寺刹)의 옛 영화가 그립구나.

지난 2013년 3월 조광선생과 함께 풍수테마기행을 시작한 이래 2년여 동안 취재팀은 경기도와 인천 곳곳을 누비며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어느 곳에서는 ‘명당중에 명당’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고, 어느 곳에서는 잘못 쓰거나 훼손된 터를 만나기도 했다.

100여곳의 양택과 음택을 둘러보는 동안 취재팀은 그렇게 다양한 상황을 만났고, 그에 따라 웃기도 하고 안타까움을 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각각 다른 곳들을 둘러보면서도 늘 취재팀을 따라다니며 다시 새겨지고 새겨졌던 하나의 ‘화두’가 있었으니, 첫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에 조광선생이 던진 “흥망성쇠(興亡盛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짧은 말이었다.

크게는 한 나라에서부터 작게는 집안이나 개인까지, 과거의 역사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까지도 풍수를 통해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그동안의 둘러보기에서 만난 음택이며 양택에 모두 한결같이 적용됐다. 당대의 고승들이 창건했다는 여러 곳의 사찰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학문과 깨달음이 깊은 당대의 고승들은 풍수지리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찾아가 둘러본 사찰들의 터는 모두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터의 기운을 따라 대사찰들의 운명과 역사가 갈렸으니, “흥망성쇠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말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닿았다.

■ ‘명당의 교본’ 신륵사

▲ 신륵사 전경-경기남부에서 손꼽히는 명찰인 여주 신륵사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 신륵사 전경-경기남부에서 손꼽히는 명찰인 여주 신륵사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 여주의 이름난 사찰인 신륵사(神勒寺)는 조광선생이 ‘명당의 기본이 잘 갖춰진 곳’으로 손꼽은 곳이다. 산이 아름답고 물이 좋기로 소문난 여주에서도 고르고 고른 곳에 터를 잡았으니, 오랫동안 이름을 떨쳐왔고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그야말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신륵사는 풍요롭게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신륵사는 청룡과 백호가 아주 좋아요. 풍수에서는 백호가 여성과 부를 상징하고, 청룡은 남성과 명예를 상징해요. 신륵사의 경우에는 백호도 잘 둘러쳐 있지만, 청룡이 더 잘 감싸고 있어서 큰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풍수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바로 물인데, 신륵사는 앞쪽으로 남한강이 휘둘러 지나가니 금상첨화격이에요.”

신륵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 앞에 서면 앞이 트이고 삼면은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기 그지없다. 멀리 앞쪽으로 명예와 권력을 불러들인다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이 길게 이어진다. 일자문성이 마치 낮은 성벽을 둘러친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신륵사는 그렇게 명당이다.

■ 골짜기에 들어앉은 고달사지

▲ 여주 고달사지는 넓은 빈터와 몇개의 유물만 남아 대사찰의 면모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여주 고달사지는 넓은 빈터와 몇개의 유물만 남아 대사찰의 면모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여주에는 한때 신륵사보다도 더 큰 규모를 자랑했던 대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빈 터만 남은 고달사(高達寺)다.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高達寺址·사적 제382호)에는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대사찰 고달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적지 면적만도 6만㎡에 달하는 넓은 고달사지는 발굴조사 후 건물터들을 흙으로 조금 높게 덮어 평지와 구분지어 놓았다. 수많은 건물지들과 군데군데 커다란 석조 문화재들이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최근에 복원해 놓은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만 보아도 높이가 5m가 넘는 대단한 규모다.

고달사는 한때는 머물던 승려만도 수백명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폐사와 관련된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이 커다란 사찰은 영광의 시대를 끝내고 말았다.

“풍수적으로 볼 때 고달사는 신륵사와 완전히 비교가 되네요. 신륵사가 명당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데 반해, 고달사는 어째서 이런 곳에 터를 잡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완전히 골짜기에 절을 지었고, 주변에 좋은 산들도 없어요. 게다가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이 여럿 보이네요. 규봉이 있다는 것은 넘보며 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는 뜻이죠. 아마도 폐사의 원인이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같은 불교 사찰이고 비슷한 지역에 있는데, 유독 신륵사는 이어지고 고달사는 몰락했다는 것은 무언가가 달랐다는 뜻이에요.”

고달사를 둘러본 후 폐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조선후기 문인 김병익이 남긴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牧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 불교를 탄압하던 시기에 유학자들에 의해 사찰들이 폐사됐으나, 신륵사는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에 폐사를 모면했다는 내용이다.

■ 고달사지와 닮은 회암사지

985189_547055_5944
▲ 옛 회암사의 역사를 잇는 지금의 회암사가 회암사지 뒷쪽에 천보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 양주 천보산 자락에는 조선시대 최대의 국찰이었던 회암사(檜巖寺)의 터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가 남아있다. 회암사는 여러 면에서 여주 고달사와 닮았다. 두 사찰은 모두 한때 승려와 신도 수천명이 머물 만큼 번성했다가, 조선후기에 갑자기 몰락해 사라졌다.

“회암사는 천보산을 주산으로 하고 터를 잡았어요. 하지만 천보산은 한눈에도 돌이 많고 거친 산이어서 풍수적으로 부족함이 많아요. 터가 넓다고는 하지만 고달사지처럼 골짜기가 진 곳에 자리를 잡았고, 토체와 일자문성도 완전하지 않아요. 더욱이 뒤쪽으로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도 보이니, 회암사 역시 늘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결국 고달사와 회암사는 풍수적으로 비슷한 조건을 가진 곳에 절이 지어졌고,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몰락의 원인이 된 것 같아요.”

그나마 회암사가 고달사보다 나은 것은, 이 절을 만들고 중창하고 지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승려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천보산의 맥을 타고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다.

회암사지가 늦게나마 발굴이 되고 박물관까지 세워지면서 다시 빛을 보고 있는 것과, 회암사지 뒤쪽에 다시 세워진 지금의 회암사가 점점 번창하고 있는 것도 그로부터 힘을 얻은게 아닐까 싶다.

/글·사진=박상일기자·metro@kyeongin.com

박상일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