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판 ‘정년이’ 재조명… ‘무형유산 등재’ 불씨 됐으면”

 

쇠퇴·재정난 속 마지막이라 생각한 ‘레전드 춘향전’ 성황… 안산문화재단 상주단체 선정

장단 소리 이끌려 여기까지… 원조 K-뮤지컬, 옛것으로 남지 않게 내년 신작 준비 최선을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여성국극제작소 대표는 지난 2019년 안산에 여성국극단의 뿌리를 내리고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여성국극제작소 대표는 지난 2019년 안산에 여성국극단의 뿌리를 내리고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니마이* 배우에게 줄곧 따라다녔다는 ‘왕자님’ 호칭이 과장은 아닌 듯했다. 진한 구레나룻, 목덜미가 드러나는 쇼트커트, 그리고 조금은 낮은 목소리. 부드러운 남성미가 묻어나는 묘한 말투와 제스처에 잠시 질문을 멈추고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다. 춘향전의 이몽룡으로 분해 호방하게 ‘사랑가’를 부르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남역(남성 배역)은 여성들이 꿈꾸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갖춘 남성성이 있어야 하고, 여역(여성 배역)은 훨씬 더 여성적이어야 돼요. 궁극적으로 남역과 여역 모두 특성을 과장해 표현해야 하는 게 여성국극 연기의 특징이에요. 특히 1세대 여성국극 선생님들이 제일 많이 말씀하신 게 ‘남역 배우는 멋있어야 한다’였어요. (남역 배우인) 저는 그 멋이 무엇인지를 끝없이 고민해왔고, 원로 선생님들 역시 부단히 연구하시면서 찾았던 거겠죠.”

여성 배우가 남성 배역까지 모두 맡아 소리·춤·연기를 선보이는 원조 ‘K-뮤지컬’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 박수빈(39) 여성국극제작소 대표는 ‘손에 꼽히는’ 젊은 세대 여성국극 남역 배우다. 지난 1999년 여성국극 데뷔 이후 지금까지 무수한 남역을 도맡아 해왔다. 여성국극을 보편적으로 알린 웹툰 ‘정년이’(2019)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다. 이 정도로 꾸준히 여성국극 무대에 오르며 입지를 굳혀온 젊은 계승자는 드물다.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여성국극제작소 대표. 2024.11.1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여성국극제작소 대표. 2024.11.1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여성국극 배우는 일단 무대에 오르기 전 변신이란 걸 하잖아요. 공주나 왕자, 새로운 캐릭터가 돼서 누군가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고 환상을 느끼게 해주죠. 이런 점에서 뿌듯하지만 한편으로는 헛헛한 마음도 들어요. 저희 세대 배우는 부흥기를 느껴본 적이 없잖아요. 항상 이번 무대가 마지막인 듯이 해왔기 때문에…. ‘또 마지막 무대가 끝났구나’라는 생각을 항상 했었죠.”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 박수빈 대표는 전망을 재고 따지기보다는 그저 매력적인 장단 소리에 이끌려 지금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안산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풍물에 발 담갔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여성국극제작소 대표. 2024.11.1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여성국극제작소 대표. 2024.11.11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안산은 와리풍물의 도시예요. 제가 경일초를 나왔는데, 9살 때 학교 앞을 지나가다 풍물 소리에 매료돼 와리풍물에 들어갔어요. 와리풍물을 하면서 판소리로 넘어갔고 판소리 스승이신 박계향 선생님이 ‘넌 여성국극 하면 참 좋겠다’라고 하시면서 공연을 연결해준 게 정동극장 상설 공연이었어요.” 여성국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는 1세대 배우 조영숙(90) 선생을 사사했다.

박수빈 대표에게 안산이라는 지역은 의미가 유독 남다르다고 한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안산이라는 도시의 색깔과 여성국극이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안산, 하면 대중성·포용성·다양성이 떠오르는데, 여성국극도 이 세 가지 요소를 잘 담고 있는 장르라 매력을 느꼈죠.”

엇비슷한 여성국극과 안산. “여성국극을 보러 안산으로 찾아오도록 하겠다”고 이야기하던 그의 포부는 이뤄졌다. 지난 주말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정년이’에 ‘매란국극단’이 있었다면, 우리네 현실에는 안산의 ‘여성국극제작소’가 자리 잡고 있다. 박수빈 대표와 황지영 배우가 지난 2019년 극단을 창단한 뒤 이끌고 있다. 지난해에는 안산문화재단 상주단체에 선정되며 여성국극사 최초로 제도권에 안착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위치한 여성국극제작소 사무실에 놓여 있는 표창장. 지난 1월 박수빈 대표는 안산시의 지역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해당 표창을 받았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위치한 여성국극제작소 사무실에 놓여 있는 표창장. 지난 1월 박수빈 대표는 안산시의 지역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해당 표창을 받았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이 시대에 여성국극이 왜 필요한데? 여성국극이 뭔데’라는 공격도 들으면서 극단을 만들었어요. 상주단체에 선정됐다는 게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거나 큰 예산을 투자받을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제도권 안에 한 발을 들이밀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드라마 ‘정년이’가 한창 방영 중이던 지난달 25일과 26일, 여성국극제작소가 선보인 ‘화인뎐’은 다양한 세대의 여성 관객들이 모여들어 객석을 가득 채웠다. 드라마 영향으로 덩달아 여성국극, 더 나아가 여성국극제작소의 공연도 재조명된 셈이다.

“뭐랄까요. 이제는 일일이 사족을 달아 설명할 필요가 없달까요. ‘정년이 보셨죠?’ 이 한마디면 되는 상황이 굉장히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안산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오른쪽) 대표와 황지영 배우의 모습.  /여성국극제작소 제공
안산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오른쪽) 대표와 황지영 배우의 모습. /여성국극제작소 제공

재조명은 인고의 시간을 견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뒤 차츰 쇠퇴해갔다. 몇 안 되는 여성국극 계승자들이 있었지만 공공의 지원 없이 민간에서 활동하며 제도권 안에 들지 못했다. 여성국극인들 대부분이 열악한 환경에서 버텨왔다. 공연 하나를 올릴 때마다 재정난에 부닥치는 건 당연지사였다.

“여성국극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였는데 ‘어째서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걸까’ 이런 답답함이 늘 있었어요.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프리랜서 일도 하면서 미친 듯이 해왔죠. 그러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정말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무대에 올린 게 지난해의 ‘레전드 춘향전’이었어요.”

마지막이라 생각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났다. 대출까지 받아가면서 지난해 8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인 공연 ‘레전드 춘향전’은 성공적이었다. 여성국극제작소의 이름을 각인시키며 안산문화재단 상주단체로 선정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역사회에 싹튼 작은 관심들도 하나하나 모여 보탬이 됐다. “여성국극제작소 창단 멤버이자 판소리 제자인 안병도 운영위원장님, 개인 후원 텀블벅 등 여러 곳에서 십시일반으로 보태주셔서 감사하게도 무대를 올렸던 거죠.”

지난해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무대에 오른 ‘레전드 춘향전’. 여성국극 전성기를 이끌었던 1세대 배우 이소자·조영숙, 2세대 배우 이미자·이옥천·김성예, 3세대 배우 박수빈·황지영이 출연했다. /여성국극제작소 제공
지난해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무대에 오른 ‘레전드 춘향전’. 여성국극 전성기를 이끌었던 1세대 배우 이소자·조영숙, 2세대 배우 이미자·이옥천·김성예, 3세대 배우 박수빈·황지영이 출연했다. /여성국극제작소 제공

한 극단을 이끄는 대표로서 그의 어깨는 한층 무거워졌다. 내년 1월에는 여성국극이 저물어가던 1960년대를 다룬 신작 ‘벼개가 된 사나히’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선보인다.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굴하지 않고 남역 배우가 되려는 한 소녀의 일대기를 그린다.

여성국극이 다시금 조명받는 현재, 르네상스가 아닌 어두웠던 과거를 돌아보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의지를 그리는 것. 어쩌면 가장 시의적절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웹툰도 드라마도 화려하게 막을 내렸지만, 현실의 평범한 ‘정년이들’에게는 불확실한 내일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년이’ 덕분에 여성국극이 널리 알려졌지만,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은 ‘정년이’가 등장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아요. 여성국극의 지속가능성을 계속 찾아 나가는 게 저희의 일이죠. 여성국극이 과거의 것으로 남지 않고, 근대 무형유산으로 등재돼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거든요. 더 좋은 퀄리티의 시청각적인 향연을 보여줄 여성국극 작품도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이에 걸맞은 제도와 안정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겠죠.”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대표가 여성국극제작소에 전하는 시민들의 응원을 말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대표가 여성국극제작소에 전하는 시민들의 응원을 말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대표가 여성국극제작소에 전하는 시민들의 응원을 말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여성국극 3세대 계승자인 박수빈(39) 대표가 여성국극제작소에 전하는 시민들의 응원을 말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니마이란? 남역 주연배우를 뜻하는 여성국극 은어. 반대로 ‘가다키’는 니마이와 대척점에 있는 남역 악역을 의미한다.

■박수빈 여성국극제작소 대표는?

▲1985년 서울 출생

▲안산 경일초등학교 졸업

▲시흥중학교 졸업

▲1999년 여성국극 데뷔

▲2019년 안산 여성국극제작소 설립

▲(사)한국판소리보존회 안산지부장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