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정확히 떠오른 순간에 존재

3년 정도 같이 살았던 옆방 할머니

그의 외로운 삶, 화려한 옷과 대조

한참 지나서 알게된 할머니의 죽음

이런 기억, 나는 왜 잊고 있었을까

김성중 소설가
김성중 소설가

기억은 어디에 있는가? 머릿속에 막연히 잠겨있을 때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이나 무의식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기억은 정확히 말해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에 존재한다. 무언가가 나를 건드려서 기억이 떠오른 순간 우리는 놀란다. 맞아, 이런 일이 있었지. 어떻게 이걸 잊고 살았을까? 이런 식으로.

시장에서 느릿느릿 걷는 다리가 불편한 어느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 걸음걸이가 나에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삼년 정도 같이 살았던, 옆방 할머니의 기억이다. 우리 가족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벌어진 지 몇 개월 후에, 그녀는 우리 집에 왔다. 가장 큰 사건이란 당연히 죽음이다. 가장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가 열세 살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담담하게 할 수 있으려면 나는 한참 더 자라야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초등학생이다. 큰 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한바탕의 폭풍우를 통과한 다음 일상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가고 생활이 이어졌다.

전업주부로 살던 엄마가 취직을 하고, 그것만으로는 나와 동생을 부양하기 벅차다는 결론이 나오자 작은 방 하나를 세를 주기로 했다. ‘옆방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 집에 왔다. 성함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옆방 할머니라고만 부른 그분은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는 아침 일찍 가게를 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종일 일하다 밤 아홉시쯤 돌아와 씻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었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지나가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잠만 잘 방을 구한다’고 말하고 계약을 했을 것 같다. 이러니 3년을 한 집에 살았어도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나는 할머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할머니의 옷에 대해서는 잘 안다. 왜냐면 할머니가 없는 낮에 그 방에 몰래 들어가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고, 행거에 걸려있는 옷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문을 잠가놓지 않았다. 그 방은 원래 내 방이었다. 그러니 호기심 많은 사춘기 여자애가 방에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물리쳤을까? 그럴리가. 나는 이런 유혹에는 항상 지는 편이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그림자처럼 깃들어 지내는데, 나 역시 할머니가 없는 방에 이따금 들어갔다 나오곤 했다. 그건 나의 비밀이었다. 방에는 할머니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옷들이 걸려있고, 텔레비전을 올려놓을 작은 서랍장밖에 없었다. 서랍장도 열어보았는데 립글로스 같은 것이 있었다. 아, 나는 몰래 할머니의 화장품도 발라보았다. 우리 엄마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라 치장도구가 없었으니까. 혼자 하는 소꿉놀이처럼 투명한 립글로즈도 발라보고, 할머니의 화려한 겉옷도 걸쳐보고, 그러다 제자리에 돌려놓고 살금살금 나왔다. 그림자에 깃든 그림자가 그 시간의 나였다. 할머니는 과거에 아주 부잣집 마나님이라고 했는데, 그 시절의 잔재인지 옷들이 비싸고 화려해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의아하다. 내가 드나드는 것을 할머니가 과연 몰랐을까?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는 재건축이 되어 허물어졌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더 먼 곳에 있는 빌라의 방을 얻어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는 시장까지 가는 길이 힘들어 중간에 보도블록에 앉아 쉬시다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죽음을 안 것도 돌아가신 후 한참 지나서였다. 방과 시장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주로 실내에서만 지내시던 할머니의 외로운 삶과 행거에 걸려있던 화려한 옷들의 대조. 나는 왜 이렇게 거대한 이야기를 잊고 있었을까?

이제야 고백하고 애도하고 싶지만 모든 것은 오래전에 완료된 과거일 뿐이다. 하나의 삭제된 기억은 하나 이상일 수 있는 더 많은 기억이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잊어버린 기억이 할머니 하나뿐일까? 내가 무심코 저질렀던 일들이 방에 몰래 숨어들어 화장품을 훔쳐 바른 것이 전부일까? 그림자 속의 그림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는 닫힌 방들이 얼마나 또 들어있는 것일까?

/김성중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