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존재의 집’

직선적·날카로움, 국민 분열 심화·포용 한계

과반 지지 위해선 ‘사이다 맛’ 대신 통합을

나라 상황 더 나빠져 이재명의 언어 바뀌길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다.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이 언어에 주목하는 이유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 언어 없이는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없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장소다.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5년 전, ‘이재명의 언어’라는 글을 썼다. 2020년 9월 칼럼이다. 당시 이재명은 경기도지사였다. 대선을 1년6개월이나 앞뒀음에도 4개 여론조사기관의 전국지표조사에서 이제 막 여당 대표로 선출된 이낙연과 차기 대선후보 지지도·적합도 1위를 막상막하로 다투던 무렵이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망치처럼 강력한 그의 언어가 나는 불편하고 불안했다. 언어는 한 인간의 세계관이다.

‘이재명의 언어는 현장의 언어고, 광장의 언어며, 전장의 언어다. 선언의 언어고, 촉구의 언어며, 결행의 언어다. 그의 언어는 언제나 직선이다. 에두르지 않는다. 시원하고 통쾌하고 거침이 없다. 하지만 직선은 가르고, 나누고, 구획하는 데에는 그 쓰임새가 유효하지만 품고, 아우르고, 합병하는 일에는 도무지 쓸모가 없다. 그의 언어가 때때로 낯설고, 거칠고, 사납고, 심지어 무서운, 그래서 불편하고 불안하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광장의 언어는 매력적이다. 전장의 언어는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국민들 마음이 두 동강 난 나라의 유력한 대권주자가 쓸 언어로선 적절치 않다. 내 편을 그러모으는 데는 유효하겠으나 내 편이 아닌 사람들까지 끌어안지는 못한다. 포섭과 포용의 언어 없이 어떻게 나라를 온전하게 운용해 나갈 수 있겠나. 그래서 그의 언어가 바뀌길 기대했다.

‘직선의 언어에 곡선의 언어가 보태지길 희망한다. 흥행하고 있는 ‘사이다 맛’ 언어만으로는 죽어도 그 짜릿한 탄산의 쾌감을 포기할 수 없는 충성스런 고객들만 붙잡고 있게 될 뿐이다. 2002년 16대 대선을 포함한 네 차례 대선에서 진보 성향의 대통령은 최고 49%의 득표율에 그쳤다. 과반을 이루지 못했다. 당내 경선까지는 몰라도 본선에서 국민 과반의 지지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 통합과 포용과 위무와 치유의 언어를 써야 한다’.

마침내 이낙연을 누르고 여당의 대선후보가 된 이재명은 2022년 벚꽃도 피기 전 치러진 20대 대선에서 47.83%를 득표했다. 한때 같은 진영에 있었던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0.73%p, 불과 24만7천77표 차이였다. 이재명의 언어 대신 윤석열의 언어가 휘날리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거리를 뒤덮었다. 그의 언어가 바뀌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까.

다시 달리는 이재명의 대권 가도엔 거침이 없다. 전·현직 도지사들과 겨룬 당내 경선은 한가롭기까지 했다. 본선의 상대는 커다란 천막을 치고 통 굴리기, 공중그네, 호랑이쇼, 코끼리쇼, 불쇼까지 버라이어티를 준비한다지만 흥행은 미지수다. 막판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사법 리스크의 현실화 전망을 낳곤 있으나 정작 본인은 해프닝으로 치부한다. 반면 나라가 처한 상황은 지난 대선 때보다 훨씬 더 나빠졌다. 진영마다 더 높게 성벽을 쌓아 올렸고, 심리적 내전은 유혈사태로 치닫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한 나라를 유지하고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다. 과반의 대통령이 나와야 하는 당위성이 역설적으로 설명된다.

그런 만큼 더욱더 이재명의 언어가 바뀌길 기대한다. 얼핏 말은 바뀌고 있는 듯한데 언어 자체의 변화로까지 체감되진 않는다. 결코 선거의 전술이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갈라서고 돌아앉은 채로 또 5년을 보낼 순 없는 일이다. 진영과 대결의 언어 대신, 미움과 갈등의 언어 대신, 소외와 배척의 언어 대신 연대와 극복의 언어를, 치유와 회복의 언어를, 그리고 위무와 통합의 언어를 써야 한다. 벚꽃잎 흩날리던 거리가 허망의 언어로 가득 찼다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거리는 진정의 언어로 가득 채워야 하지 않겠나.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