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헌법, 국민투표 92% 찬성 통과
고대 시칠리아 원정·히틀러 당선 등
역사적 시민 잘못된 선택 다수 불구
결정적 순간 되돌릴 지혜·용기 발휘
국민이 무섭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정치 전공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필자가 항상 의문을 가져왔던 말 중에 하나가 ‘국민은 항상 옳다’이다. 아무리 정치적 수사라 하지만 국민도 결국 유한한 인간들의 집합인데 어떻게 항상 옳을 수가 있겠는가? 특히 정치인이나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라면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압박감을 느낄 것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이나 시민이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시민들의 욕심과 그릇된 판단으로 공동체가 큰 위기에 빠진 사례를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꽃피운 고대 아테네는 시민들의 탐욕과 오판으로 결국 몰락의 길로 갔다. 결정적인 사건이 시칠리아 원정이었다. 전쟁과 식민지 건설에서 오는 물질적 안락함에 빠져든 시민들이 시칠리아에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한 대규모 원정을 결정했다가 정예군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급격하게 국력이 쇠약해진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에게 전쟁을 지고 만다.
자주 언급되지만 히틀러는 군사 쿠데타가 아니라 독일 국민의 선거를 통해서 등장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사회 불안으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더라도 결국 국민이 현대사 최악의 독재자를 역사에 불러들였고, 또 대다수 독일 국민이 나치 정권에 충성했다. 이런 독일 국민의 선택을 잘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국민이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2%가 넘는 찬성으로 통과됐다. 유신 이전과 이후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유신헌법으로 민주주의가 말살되리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 현대사에서 국민이 좀 더 현명하고 적극적인 결정을 했더라면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리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역사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것도 국민과 시민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승만의 독재와 수십년 간의 군부통치를 끝낸 것도 국민의 저항과 힘이었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불씨를 끝까지 지켜낸 것도 광주 시민의 희생정신이었다.
최근에 우리는 유사한 사례들을 목도했다. 시민들이 지난 연말 윤석열의 불법 계엄을 막아냈고, 어제 국민의힘의 후보 교체 쿠데타를 막아낸 것은 당원들이었다. 우리 국민은 평소에는 침묵하는 것 같다가도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되고 국민의 권리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때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지만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절차적 요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의 저항을 받았고 결국 탄핵되었다. 당원과 국민이 뽑은 후보를 무리하게 몰아내려던 지난 며칠 간의 국민의힘 내부의 소동은 당원들의 역풍을 맞고 끝이 났다. 여론상으로 후보 교체를 원하는 당원들이 더 많았지만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당 지도부의 폭거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21대 대선의 대진표가 결정됐다. 모든 후보와 정당은 국민은 항상 옳다고 입으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국민이 무섭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고민하고 정책으로 제시해야 한다. 유권자가 지금은 지지를 보내는 것 같지만 꼭 마음에 흡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 수 있다.
우리 국민은 정치세력이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어기거나 국민 전체보다는 정파의 이익을 우선할 때, 그때는 매섭게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다. 국민이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정치세력이 금도를 넘어설 때는 항상 저항하고 응징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일기에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고 썼다. 우리 국민의 저력을 몸소 체험한 노정객이 우리 모두에게 남긴 유언임에 틀림 없다.
/신철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경인일보 Copyright ⓒ 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