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주택가 위치한 도자기 매장
그곳서 도예가 최재훈씨와 첫 인사
공들인 공방, 시청명령에 자진 철거
허무하게 보낸 50대, 시간이 약이 돼
좋아하는 도자기 빚을 수 있어 행복


점심을 먹고 산책하는 길에 도자기 매장이 있다.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매장은 닫혀있을 때가 많다. 가끔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둥근 항아리와 손자국으로 이지러진 찻잔과 화병이 전시되어 있고 한쪽에는 물레가 놓여있다. 벽에는 ‘과천요’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손님이 없으니 매장이 곧 사라질 것만 같아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가정의 달’이라며 작약꽃 한 다발을 보내준 지인 덕에 나는 그 매장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꽃을 꽂으려면 화병이 큼직해야 하는데 이참에 번듯한 달항아리를 가져야겠다는 욕심을 낸 것이다.
거기에서 도예가 최재훈(58)씨와 첫인사를 했다. 2013년 ‘월광대호(月光大壺)’라는 제목의 달항아리전을 열었던 작가는 이후 긴 슬럼프를 겪고 있다. “최근엔 개인전을 안 하시나봐요?”라는 질문에 그는 자신의 공백기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과천시 갈현동에서 클레이 하우스(clay house)라는 도자기 공방을 운영했던 그는 과천지식정보타운(지정타) 개발과 함께 땅이 수용되면서 대우건설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의해 거칠게 쫓겨났다. 그는 “대우나 LH 애들은 그냥 깡패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옮겨갈 곳을 물색했는데, 굳이 과천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후원자 때문에 소각장 주변의 그린벨트 땅을 구입했다. 그는 거기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약 165㎡(50평) 규모의 도자기 공방을 꾸몄다. 뭐든 완벽을 기하는 성격에 자꾸 욕심을 내다보니 ‘호텔처럼’ 멋지게 지어졌다. “귀신에 씌어버린 거죠. 설계를 하다보니 더 좋게 하려는 마음밖에 없어서, 또 흙작업이라 난방시설도 필요해서 공사가 커졌어요.”
공방이 거의 완성됐을 때 시청에서 철거하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이거 큰일납니다. 철거를 안하면 우리가 포클레인을 동원해 부숴버릴 겁니다.” 그는 일단 불법임을 인정하고 몇천만원을 들여 자진 철거했다. “결국 꿈의 작업장을 지어 제 스스로 곧바로 부순 거죠.”
당초 경주에 내려가라고 독려했던 부인은 “당신은 결국 안 되겠어. 그렇게 말을 안 들으니.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아”라며 이혼을 요구했다.
그때 그는 우연히 아이들한테 도자기를 가르치는 공방이 나왔다는 전단지를 보았다. 그게 지금의 작업장이다. 그는 “그러나 들어오고 싶지가 않았어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거죠. 계약을 하고도 두 번이나 취소해서 주인이 미쳤다고 했어요. 사실 갈 데가 없으니까 멘붕이 오더라고요. 이곳은 내가 원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정신치료를 받으며 4년간 아파트에 누워있었다. 매미울음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매미소리를 들으면 디젤 냄새를 풍기며 작업장을 때려 부수던 그 포클레인의 악몽이 떠올랐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요양원에 누워있는 어르신들이 생각났다. ‘그분들은 어떤 생각으로 누워있을까?’ 그는 비로소 죽음을 생각했다. 그때 느꼈다. ‘아, 영원한 게 없구나! 되지도 않을 걸 꿈에 부풀어 그린벨트 안에 모래성을 쌓았구나’.
그는 8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셨다. 간이 망가지고 당뇨병 직전까지 왔다.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열심히 살았다고 했는데 이게 뭔가?’
50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앞뒤를 재지 않고 몰아붙일 때는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약이 됐다. 적어도 자신의 똥고집 때문에 망한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혼을 당했지만 도자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책임질 일이 없어요. 저보다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요. 작품이고 뭐고 여기 사는 것도 부끄럽지 않고, 제가 좋아하는 도자기를 빚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해요.”
지금도 가끔 불안증세가 올라온다. “최재훈 명의의 안정적인 작업장만 있으면 병이 나을 거예요. 제 병은 제가 알아요.”
/김예옥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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