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따금, 문득, 때로 내가 살고 있는지, 살아 있는지, 이게 사는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금 이게 꿈속은 아닌지, 내가 나의 삶을 의심하며 내게 묻기도 하고,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내게 묻기도 한다. 내 하루하루가 초라하고 괴롭고 슬퍼지지는 않는지, 그럭저럭 그래도, 잘못 디딘 곳이 많고 볼품없고 허술한 곳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런 거지 그저 이런 거지 이러면 되지 스스로 위안도 하며, 일어나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물도 마시고 어질러 놓은 책도 챙기고, 거실도 정리하고, 밖에 나가 앞 산도 한 번 보고, 뒷산도 돌아다 보고, 물도 보고, 숨도 몰아쉬며, 아침이구나, 또 하루를 시작하였다.
참새가 벌써 새끼를 기르나, 마당 가 감나무 잎 사이에 푸른 벌레를 물고 나를 경계한다. 까치가 앉아 있는 느티나무도 본다. 어? 오늘 아침에는 꾀꼬리가 날아와 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으로 가만 가만 노랗게 그네를 타는구나.
집 밖으로 걸어 나가 마늘 밭 가를 어슬렁거리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본다. 찔레 꽃은 벌써 지고 없구나. 나는 지금, 쓸쓸한가? 한가한가? 나의 시에 대한 나의 고민과 외로움과 괴로움은 정당한가. 세상에 대한 나의 말과 글은, 그 행색이 초라하지는 않은지, 내 걸음걸이는 가난하지 않고 내 얼굴 표현은 정당하고, 내 말은 저문 나무같이 아름다운가? 내가 이렇게 살자고 제법 그럴듯한 말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간섭하고 불편하게 하고, 힘든 데다 더 힘든 말을 보태지는 않은지, 불안과 적개심은 조성하지는 않는지, 마을을 돌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앞에 샘과 뒷산 감나무를 보고 새소리들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시가 바람처럼, 기억나지 않은 어느 날 날씨처럼 새소리처럼 햇살처럼 없었던 것처럼 자국 없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 생이 풀잎이나 나뭇잎을 가만히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 같이 서서히 사라지면 그만이겠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고 앞산의 진초록은 해마다 지치지 않고 저리 진저리를 치며 푸르러질 것이다.
숨 막히던 진초록이 지나갔다, 여기까지 산은 얼마나 요동쳤는가. 그러면서 초록은 동색이 되어 성하(盛夏)의 입구에 의연하게 섰다. 올해 새로 길어 난 마당 가 감나무 가지를 뼘으로 재어보니, 30㎝는 더 자랐다. 감꽃이 피었구나. 꽃진 다음으로 감이 커갈 것이다. 놀랍다. ‘자연은 건너뛰지 않는다’.
나는 평생을 어머님과 아버님이 사시던 집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사시고 내가 태어나 자라 사는 집이 아니었으면 이런저런 일 속에서 사는 내 마음이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할 때도 더러 있다. 살아 온 많은 것들을 잊고 잃어버리고 사니까. 나의 삶은 고향을 멀리 두고 이따금 그리워하며 사는 일상이 아니다. 회한이 더 짙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내 삶을 내 주머니에 우겨서 넣고, 만지작거리며 날이면 날마다 강가로 걸어 나간다.
바람이 부는구나. 몇천 만개의 나뭇잎을 흔들고 몇천 만개도 넘는 바람이 앞산에 불어오는구나. 오늘은 강 건너 숲에서 새들이 많이도 우짖는다. 새들아 오늘 만은 우리를 위해 울어다오.
강가에 서 있다가 삶이 이래도 된다고, 어쩌겠냐고, 가보자고, 오늘도 강을 건너가 보자며, 그러자며 강을 건너간다. 그냥, 사는 게 이렇게 호젓하게, 삶은, 삶이 이렇게 구석구석 살아지는구나. 그래,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강을 건너면 산이다. 산을 올려다본다. 그 위에 구름이다. 구름은 흐른다. 때로 나를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후회하고 나를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며 세상에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때로는 못난 나를 스스로 위로하다, 다시 걷는다. 걷는 것이 나는 좋다. 지금을 버리고 다음을 딛고 그다음 새 땅을 디디면 또 새 땅이 온다.
나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대통령이 있는 듯 없는 듯 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아니라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사람’ 말이다. 나는 이 나라 백성이다. 때로는 나도 나라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룬 적은 있었지만, 대통령을 생각하며 ‘그런’ 적은 없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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