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 바로 취미

조선 왕 헌종도 ‘그림 그리기’ 즐겨

세자 땐 창덕궁 수방재 고서화 열람

허나 유교적 통념에 취미 숨겼어야

신하 조언에 수방재 전성기도 끝나

傳 헌종 ‘산수도’(1843년, 종이에 먹, 38.7×62.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傳 헌종 ‘산수도’(1843년, 종이에 먹, 38.7×62.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미술사 조교수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미술사 조교수

우리는 종종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취미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여기서 ‘전문적이지 않다’는 것보다는 ‘즐기기 위해 한다’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취미란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성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취미생활이 늘 사회적으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일은 산업화가 진행되던 근대기에 여가 문화가 도입되면서 비로소 가치 있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옛사람들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취미다운 취미를 누릴 수 있었을까? 19세기 조선의 왕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평소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산수도’를 보면 화면 오른쪽 위에 ‘원헌(元軒)’이라는 자신의 인장을 찍었고, 왼쪽에는 ‘계묘년(1843) 봄, 삼수당(三秀堂)에서 그렸다’라는 글귀를 썼다. 그 옆에 첨부된 정병조(鄭丙朝)의 글은 원헌은 헌종의 호인데 궁중에서 유출된 그림이니 더욱 귀하게 간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몇 그루의 나무 아래 긴 누각과 강 위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가 한적한 분위기와 함께 소박한 여백의 미를 잘 전달해준다.

헌종의 그림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세자 시절부터 창덕궁 중희당(重熙堂)과 낙선재(樂善齋) 일대에 고서화를 수집해 놓았다. 그중 중희당 뒤편에 청나라식 벽돌 건물인 ‘수방재(漱芳齋)’라는 서재가 있었다. 청 건륭제의 장서실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의 부친 효명세자 때부터 사용된 장소였다. 헌종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서화를 열람하곤 했다. 때로는 자신이 총애하던 화가 허련(許鍊)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품평했으며, 문인 이유원(李裕元)도 수방재에서 소동파의 글씨 탁본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맹자’에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더 좋아하게 된다’고 했던가. 군주가 물건을 좋아하니 신하들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드러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양반이었던 그들은 실제로 그러지 못했다. ‘선비가 물건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뜻을 잃는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유교적 통념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취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심상규는 가성각(嘉聲閣)에서 고려청자를 어루만졌고, 남공철은 고동서화각(古董書畵閣)에 자신의 애장품을 보관했다. 수석에 몰두했던 이희천은 세상에 희귀한 돌을 수집했다하여 만석루(萬石樓)라 이름 붙였다. 이러한 공간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오직 주인의 취미에 공감할 수 있는 소수의 지인들과 공유했을뿐이다.

헌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유원은 헌종에게 국왕의 덕목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을 했고 이후 헌종은 다시는 신하들에게 그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수방재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취미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문성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은 전문가로 가는 출발점이다. 탐구의 시작이자 자신을 위로해 주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만큼 내용도 깊어지기 때문이다.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미술사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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