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뉴월 얼음꽃 만들던 지배층… 도읍 강화는 사치의 극치였다

 

반대 여론에도… 최우 수도 천도

태조왕건 능도 개골동 이장 기록

 

인구 밀집으로 화재땐 재난 수준

권력층 얼음창고·비단장막 ‘호화’

금장식 관탓에 무덤 도굴도 빈번

지난 2021년 강화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유적의 모습. 고려가 강화도에 쌓은 성곽인 ‘강화중성’에서 19m 길이의 치성(雉城) 추정 시설물이 발견됐는데, 치성은 성벽 바깥쪽에 돌출시켜 조성한 방어 시설이다. 오른쪽으로 길쭉한 부분이 치성으로 추정되는 시설물이다. /경인일보DB
지난 2021년 강화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유적의 모습. 고려가 강화도에 쌓은 성곽인 ‘강화중성’에서 19m 길이의 치성(雉城) 추정 시설물이 발견됐는데, 치성은 성벽 바깥쪽에 돌출시켜 조성한 방어 시설이다. 오른쪽으로 길쭉한 부분이 치성으로 추정되는 시설물이다. /경인일보DB

몽골 침입 이듬해(1232년) 고려 정부는 전격적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겼다. 강화로의 수도 이전은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1249)가 주도했다.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고려사절요’는 ‘경도(京都, 개성)에는 호수(戶數)가 10만에 이르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인정이 향토를 편안히 여겨 옮기기를 어렵게 여겼다’라고 강화 천도에 반대하는 여론이 많았음을 분명히 밝혔다. 반대하다가 목이 날아간 대신이 여럿이었다. 최씨 무인 세력의 위세에 눌려 임금조차 어쩌지를 못했다. 도읍을 강화로 이전하는 사업은 급물살을 탔다.

■ 강화 신도시는 개성의 판박이

강화도 궁궐 조성 사업에는 군대를 동원했다. 궁궐의 전각이며, 새로 지은 사찰 등이 개성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지은 강화의 궁궐 전각도 여럿이다. 낙진궁, 강안전, 연경궁, 수창궁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세조와 태조의 묘를 강화 개골동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잠깐 머물다가 다시 갈 요량이 아니었다.

개성의 백성들은 강제로 이사해야 했다. 동·남·서·북·중부로 구성된 개성의 5부 백성들을 강화로 보냈다. 출발 기일에 맞추지 못하는 이들은 군법으로 다스린다고 엄포를 놓았다.

개성에 10만 호가 산다고 했으니, 한순간에 강화에 수십 만 명의 인구가 불어난 셈이다.

무신정권은 강화 도읍지를 지키기 위해 개성에서의 방식처럼 외성을 쌓고(1237), 중성 축성(1250)까지 마쳤다.

■ 사회 재난 수준의 화재

강화 신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 살았는지는 당시 화재 기록으로 엿볼 수 있다. 도읍을 옮기고 2년 뒤인 1234년 봄 ‘대궐 남쪽 동네 수천 호의 집이 불에 탔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이 있다. 1245년 봄에는 ‘견자산 북쪽 마을 민가 800여 호에 불이 나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고 연경궁까지 연소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보인다.

■ 지배층의 초호화판 생활

왕족이나 최씨 무신 집안을 비롯한 지배층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이었다. 최우가 거처하는 곳에 조성한 동산이 수십 리에 달했으며, 개인 얼음 창고를 두었다. 잔치를 할 때는 채색 비단으로 장막을 두르고, 그네를 띄우고, 은 단추와 자개로 꾸미고, 4개의 큰 동이에 각각 얼음 봉우리를 만들어 얼음 꽃을 만들었다. 이때가 음력 5월, 초여름이었다. 1천350여 명이나 동원해 풍악을 울리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는 기록이 있다.

■ 화폐는 은, 비단, 무명 따위

강화 도읍 시기 은이나 비단 등으로 인건비나 물건 값을 매겼다. 1245년 최고 실권자 최우는 자신의 집 잔치에 동원된 기술자, 기녀(伎女), 광대 들에게 백은(白銀), 금백(金帛) 등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은이나 비단을 대가로 지불했다는 얘기다. 1249년에도 기술자들에게 은과 무명을 지급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있다.

■ 기타 사회상

왕릉을 비롯한 지배층 무덤 도굴 사건도 빈번했다. 당시 지배층 장례 때 관(棺)에 금장식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니 부장품의 호화로움은 말할 나위가 없을 터이다. 1246년 겨울에 가서야 ‘비로소 관곽(棺槨)에 금박(金薄)하는 일을 금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무덤에 금은보화가 들었으니, ‘도둑이 후릉과 예릉, 두 능을 팠다’ 같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뒤따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듯 보인다.

당시 강화에서는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천문관측 기관이 있었다. 사천대(司天臺)에서 하늘을 관찰해 왕에게 보고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