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행궁 위치 서울 금천구인 이유
원행길에 맞춰 시흥로 만든 ‘정조’
안양천 좌측 금천 ‘시흥 신도시’로
現 금천구·안양시 경계 호암산 안쪽
부흥 꿈 꿔… ‘역사 공간’ 또 보고파
왕이 도성에서 나라를 다스리며 사는 곳은 궁궐이다. 도성 안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은 왕이 살며 정치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왕이 도성을 벗어나 임시로 머무는 공간은 행궁이다. 유사시 피난처로 사용한 남한산성 행궁과 북한산성 행궁이 도성 밖에 있었다. 한강 건너 남한산성과 삼각산 따라 북한산성은 한양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용 산성이자 왕이 머무는 행궁이었다. 또한 왕과 왕비가 온천 치료차 가는 온양행궁, 왕과 신하가 능행차 머무는 노량행궁, 시흥행궁, 화성행궁이 있었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부터 1800년(정조 24)까지 12년간 13차례 수원으로 행차하였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다.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정조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가 즉위식 첫 일성이었다. 왕이 된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옮기고, 현륭원 주변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현륭원 천장과 함께 수원 신도시도 팔달산 기슭에 만든다. 커다란 국책사업이었다.
현륭원 원행시 머물 행궁 건립도 동시에 추진하였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으뜸이었다. 정조는 수원 행차 때마다 화성행궁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왕의 행차에 맞추어 다양한 행사를 백성들과 함께한 여민락의 잔치다. 또한 수원유수의 지방행정 및 군사 지휘 등 복합적 행사를 하였다. 배다리를 이용한 한강 도하 후 노량행궁인 용양봉저정에서 점심도 하였다. 노량행궁은 한강대교 지나 상도터널 가기 전 사육신묘 왼편에 있다. 노량행궁 지나 장승배기 따라 행차길에 백성들과도 만났다. 그 길 따라가면 시흥행궁이 나온다. 그런데 시흥행궁은 시흥시에 있지 않고,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 왜 그럴까?
시흥은 고려시대 금주(衿州)로 불렸다. 큰 물길이 있는 곳에 도시가 만들어졌다. 한강으로 흐르는 큰 물길 안양천 34.8㎞는 10여 개 이름이 남아있다. 군포천·사근천·학의천·인덕원천·안양천·갈천·대천·한천·한내·염천·오목내·철곶포·양천강이 한강과 만났지만 일제강점기 행정 편의를 위해 안양천으로 불렸다. 안양천은 안양사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양천은 관악산과 삼성산에서 시작해 호암산성 주변 물길이 다 모였다. 호암산은 금주산으로도 불렸는데 시흥행궁을 감싸주는 산이다. 호암산이 서울시 금천구와 경기도 안양시의 경계다. 또한 거대한 물길이자 한강과 만나는 안양천 좌·우로 금천(衿川)과 양천(陽川)이 있다.
하지만 1795년(정조 19)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에 맞춘 7박 8일 아버지 사도세자 현륭원 원행길에 맞춰 시흥로를 만들었다. 또한 금천을 시흥(始興)이라는 신도시로 바꾸며 새로운 부흥을 꿈꾼다. 관악산 아래 호암산과 호압사 기슭 시흥 관아와 시흥향교 사이 시흥행궁을 안전하게 짓는다. 정조의 야심찬 계획으로 수원 신도시에 화성행궁과 시흥 신도시에 시흥행궁을 지어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였다.
안양천 사이 서울시 금천구와 경기도 광명시는 ‘시흥 신도시’로 시흥행궁이 있던 역사·문화·생태 공간이었다. 정조 후 순조·헌종·철종·고종도 다니던 왕의 길이 시흥대로가 되었다. 시흥대로에서 시흥행궁과 시흥향교를 다시 보고 싶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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