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퇴직연금공단·노동경찰 등 생겨
급속 변화… 세계체제론으로 살펴야
세계 ‘통합 자본주의 네트워크’ 변모
유기적 의존 韓美, 하나의 주권블록
메커니즘 위기… 지혜가 절실해져

지금 한국은 ‘고요하다’. 무서운 세계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는 나라답지 않다. 산채에 들어앉은 것 같이 ‘고요한’ 가운데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다. 나라가 시시각각 변모하고 있다.
당장 가까이는 퇴직연금공단이 생긴다던가. 지금까지는 월급 받는 직장인들이 퇴직하면 한꺼번에 큰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나라가 대신 관리해 준다고 한다. 잘게 쪼개서 달마다 받게 한다는 것이다. 노동경찰이라는 것도 생긴다고 한다. 근로감독관을 그렇게 변화시킨다는 것인데, ‘감독’이 ‘경찰’로 바뀐다 하니 어딘지 모르게 말이 무섭다.
하나하나 꼽자면 한도 끝도 없다. 분명 나라는 무서운 속도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을 이 나라 안의 맥락에서만 따질 수 없을 것 같다. 한 나라의 움직임을 그 나라의 자체 맥락에서만 따지지 말고, 더 넓게 살피자는 것이 ‘세계체제론’(world-systems theory)이다.
옛날에도 그런 체제가 분명히 작동했겠지만, 다소 느리고도 느슨했을 것이다. 현대세계의 세계체제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잘 알려진 것은 임마누엘 월러스틴(Immanual Wallerstein)의 자본주의 세계체제 분석이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중심(core)’과 주변부(periphery), 반주변(semi-periphery)으로 나누었고, 중심과 주변의 경제적 ‘지배-종속’ 관계를 강조했다. 이러한 ‘지배-종속’ 관계는 구조적이고, 따라서 ‘불변적’이다. 중심과 주변의 불균등 발전에 의해 그 종속적 구조는 시간이 흐름과 함께 강화, 심화된다.
이러한 ‘세계체제론’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풍미한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의 발전된 형태다. 여러 형태의 종속이론에 공통적인 것은 주변부 자본주의는 중심부 자본주의에 대해 언제까지든 종속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체제의 해답, 탈출구는 혁명으로 이 세계체제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고리’라고 하면, 레닌의 ‘제국주의론(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 1917)’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약한 고리’(the weakest link)라는 말이 생각된다. 레닌은 이 약한 고리가 되는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마르크스의 논리를 수정한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제 자본주의는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었고, 그럼으로써 이 세계체제의 약한 고리에서 혁명이 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세계체제화했으므로 혁명도 세계체제 단위에서,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그 모순이 심각하고 불안정한 나라에서 발생하리라 한 것이다. 레닌의 목적론적, 실용주의적 사고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함께 쓴 ‘제국’(2000)은 레닌주의 ‘제국주의론’이 보여준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 개념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제 세계가 하나의 통합된 자본주의 네트워크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이 자본주의적 ‘제국’은 초국가적이고 탈중심적인 글로벌 권력 시스템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몇 개의 ‘주권 블록’(sovereignty bloc)으로 나누어진다. ‘주권 블록’이란 ‘국가, 초국적 기업, 국제기구, NGO, 군사동맹, 국제법 체계’와 같은 다양한 권력 주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적인 글로벌 통치구조를 가리킨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미국과 한국은 ‘하나’의 주권 블록, 또는 연합을 형성할 수 있다. 레닌의 개별 국가단위적 ‘제국주의론’으로 말하면 한국은 미국의 신식민지라 하겠다. 네그리·하트의 ‘제국론’에 입각하면 미국과 한국은 하나의 주권 블록으로 권력을 분유(分有)하며 그 힘의 크고 작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된다.
지금 이 ‘주권 블록’에 심대한 균열과 변화가 닥쳐왔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은 바야흐로 중국 중심의 ‘주권 블록’에 새롭게 편입되려 하는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인가? 바야흐로 심각한 위기의 시대다. 삶의 미래를 옳게 보는 지혜, 밝은 눈이 절실한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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