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새해 겨울 함께 찍은 사진
건축민박학교 얼개 짜며 즐거웠다
“설계 매순간 성찰의 계단 올라”
평생 참 건축을 향해 정진했던
그에게 수행자의 모습 발견해
연구실 책상 옆 서랍장 위에 이일훈 형과 함께했던 1998년 새해 겨울, 눈 내리던 날 밤, 형이 설계한 삼척 민박집 재색불이를 향하다 고갯마루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이 놓여 있다. 손에 쥔 것도 없이 열정 하나만으로 월간 ‘건축인 poar’를 발간하던 시절이었다. 사진은 근 30년 전의 시간에 멈춰 있다.
밤을 잊은 1박의 여운을 안고 돌아오는 길에 그해 여름 재색불이에서 건축민박학교를 열기로 하고 20~30대 건축인들을 수강생으로 하는 2박3일 프로그램의 얼개를 얘기하며 우리는 즐거웠다. 그리고 7월 중순에 문을 연 건축민박학교의 열기는 뜨거웠다. 45인승 버스 한 대를 대절하여 서울 당산동을 출발한 날로부터 삼척에서의 무박 3일, 형은 연장자 예우 차원에서 교장으로 추대된 시인 이영유 선생과 더불어 학교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형은 40대 초반, 이영유 선생은 40대 후반의 나이였다. 나와 동지들 대부분은 30대 중반. 학생들 대부분은 20대. 모두들 활력이 넘쳤다.
건축민박학교는 선생과 선배와 후배가 적정거리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응원하던 현장 워크숍이었다. 낮에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열심히 뛰어놀고, 땀 흘린 뒤에는 재색불이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아 함께 공부했다. 밤새 퍼붓는 장맛비에도 꺼지지 않는 모닥불 주위에 모여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휴대전화가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눈과 손을 빼앗기는 스마트폰의 시대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형은 책이란 세계에서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될 것인가를 예감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손에 든 작은 수첩에 틈틈이 무언가를 적곤 했지만 저술한 책이 거의 없었고 책보다는 늘상 건축하는 현장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음 맞는 후배들과의 술자리를 더욱 즐겼던 것 같다. 형의 입담은, 훗날에 우리가 형이 쓴 여러 권의 책과 신문 칼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만, 늘 건축을 향한 남다른 의지와 혜안을 담았고 건축 작업의 비애마저 흥겹게 풀어냈다.
돌아보니 건축민박학교에서 형과 함께했던 추억은 시간 상자라는 모형 속을 걷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형이 생전에 쓰고 절판된 책 ‘모형 속을 걷다’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건축 설계를 업으로 사는 이들에게 애물단지가 돼버리기 일쑤인 모형이 타임머신이자 서사의 샘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고 걷기라는 천천히 사유함의 속도계까지 부착시켜놓았으니 건축함에 관한 더 이상의 간명한 정의가 있을까.
건축 설계를 하던 매 순간 성찰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건축가는 어떻게 사는 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에둘러 정의하고는 우리 곁을 떠나 모형 속으로 걸어 들어간 형에게서 평생 참 건축을 향해 정진했던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세상과 사람과 건축을 믿고 짝사랑했던 사람, 건축가 이일훈 형의 4주기(7월2일)에 맞춰 형의 존재를 기리는 이들이 함께 ‘다시, 모형 속을 걷다’(바다위의정원 발행)를 출간했다.
/전진삼 건축평론가·‘와이드AR’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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