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한 민족대표들 대신 광장으로…

1919년에도 저항 주역은 학생이었다

 

폭력사태 우려했던 민족대표 33인

찾아간 청년들 항의에도 ‘지도부 포기’

자발적 체포후 학생 주도 운동 전개

삼일운동의 시발점이었던 파고다공원. 팔각정과 원각사지 십층석탑.
삼일운동의 시발점이었던 파고다공원. 팔각정과 원각사지 십층석탑.

“3월1일, 사람들이 파고다 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른다. 너희도 같은 마음이라면 와.”

추운 겨울 교실 한가운데 놓인 난로 주변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던 학생들 사이로 한 학생이 고개를 쑥 들이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학생 대표 길영희(1900~1984)였다. 경성의전 2학년이던 선배 한위건(1896~1937)으로부터 3·1 만세시위 계획을 듣고 난 뒤, 길영희는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였다. 일본인 학생과 교사들의 눈을 피해 조선인 학생에게만 은밀히 접근했다. 길영희는 아침 휴게 시간 강당에 남은 학생들에게, 쉬는 시간 교실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친구들에게 다가가 3월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날 것이란 사실을 알렸다.1

1919년 3·1운동의 주역은 단연 학생들이었다. 일제 재판부조차 3·1운동 주동자·참여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이 운동의 성부(成否)는 첫째로 학생의 결속에 힘입은 바 크다’고 언급했다.2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경찰에 체포되는 동안, 학생들은 시민들과 결속해 파고다 공원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울부짖었다. 그 만세운동 중심에 선 학생 중에는 훗날 인천 교육계의 ‘영원한 등불’이 된 길영희 선생도 있었다.

길영희
길영희

■ 입에서 입으로, 학생들 사이 퍼져간 독립 열망

“같은 학교(경성의전) 학생인 이형원과 오태영이 너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던데?” 파고다 공원에서 3·1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된 길영희는 이 같은 호리 나오키(堀直樹) 예심 판사의 물음에 “나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며 자신이 학생들을 주동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수사기관은 동급생들의 증언을 확보하긴 했으나, 길영희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길영희는 “독립운동 이야기는 당시 대다수 학생들 사이에서 퍼져있던 이야기”라는 취지로 일관했다.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길영희는 변호인 기리야마(切山)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고, 결국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보안법 위반)만 인정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수사기관은 판결 선고 3개월 전부터 길영희를 구금한 상태에서 조사와 재판을 진행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결국 경성의전에서 퇴학당했다.

■ 독립운동 이어갈 학생 대표를 지켜라

한위건
한위건

“2월20일경 한위건과 독립운동에 관해 이야기했나?” (예심 판사)

“이승만이 파리에서 조선 독립 운동을 하고, 도쿄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이 독립선언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들었느냐고 물었소. 그런데 그는 모른다고 했소.” (길영희)

대화를 나눈 날짜까지 언급하며 경성의전 2학년 학생 한위건에 대해 묻는 호리 나오키 예심 판사의 질문에 길영희는 놀란 기색을 감추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한위건은 서울(경성)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학생 중 한 명이다. 길영희에게 3·1운동 계획을 알리고, 이를 1학년 학생들에게 전파해 달라고 요청한 인물이었다. 한위건이 해외 독립운동 정세를 모를 리 없었다.

한위건은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학생 모임에서 가장 먼저 각 학교 대표자를 선출해 조직을 꾸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한위건은 학교 대표자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경성의전 대표인 김형기(1896~1950)가 경찰에 체포될 경우 대신 독립운동을 주도할 ‘2선 대표’로 활동하면서,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3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길영희는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도주하고 있는 한위건을 숨기기 위해 “한위건은 내 선배이기 때문에 알고는 있으나, 특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어떻게 친하지도 않은데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느냐는 예심 판사의 질문이 나왔다. 길영희는 “그런 이야기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소문이 돌고 있었소. 특별히 한위건과 말한 건 아니오”라며 한위건이 학생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한위건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했고, 그해 4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게 된다.4

■ 민족대표 33인 공백 메운 학생들

학생들은 어떻게 3·1운동의 주역이 됐을까. 그해 1월 중순께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를 맡던 박희도(1889~1952)는 학생회원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한위건과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1894~1928),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강기덕(1886~?) 등 학생들을 중국음식점 대관원으로 불러 모았다. 3·1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민족대표들과 거사를 논의하던 박희도는 전문학교에서 대표적 인물을 찾아 조직을 꾸리고, 이들에게 학생들의 규합과 독립운동 실행을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겼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학생 대표들은 주기적으로 회합해 조직적인 학생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3월1일 만세시위에는 중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으로 참여하고, 전문학교 대표들은 최대한 집회에 나오지 않도록 했다. 1일 만세시위 당일 전문학교 대표들이 경찰에 체포돼 3월5일로 계획한 학생들의 독자적 독립운동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이었다.5

3월1일 학생들과 민족대표가 약속한 오후 2시가 지났지만, 민족대표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중들이 허둥지둥거리며 혼란에 빠진 사이 민족대표 33명은 중국음식집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은 민족대표들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곧 강기덕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태화관에 있는 민족대표들을 발견했다.

강기덕은 학생들이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오지 않는 것은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회유했다. 그러나 ‘폭력적인 행동이 발생할 수 있어 파고다 공원에 갈 수 없다’는 민족대표들의 뜻은 확고했다. 강기덕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당시 화가 난 나머지 민족대표들에게 ‘실례되는 태도’를 취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팔을 잡고 제지하는 등 극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민족대표들은 자진해 경찰에 체포됐다. 학생 대표들은 다시 파고다 공원으로 돌아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6

3월 5일 남대문광장 집결 시위 결의

‘피 흘릴 각오’ 붉은 수건 팔뚝에 둘러

수만 군중 환호, 일제 경찰과 격돌

만세운동 전국적인 확산 계기 마련

■ ‘피를 흘릴 각오로’ 붉게 물든 광장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 당시 거리로 나온 군중들의 모습.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 당시 거리로 나온 군중들의 모습.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체포되며 사실상 지도부 역할을 포기한 뒤, 학생들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학생 지도부는 3·1 만세시위보다 그 이후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3·5 학생운동에 집중했다.

4일 오전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전문학교 학생 40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한위건은 “3월5일 오전 9시 남대문 역전 광장에 집합해 학생 주최의 독립시위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만세시위는 강기덕과 김원벽이 지휘를 맡았다. 이날 밤 학생들은 태극기를 가져오라는 통고문 400장를 인쇄해 배포했다. 경찰은 이 정보를 탐지하고 5일 이른 아침부터 보병 1개 중대를 대한문 부근에 배치했다. 오전 8시께 남대문 역전에 수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조선독립’이라고 적힌 깃발을 손에 쥔 강기덕과 김원벽이 인력거를 타고 등장했다. 수만명이 그 모습을 보고 환호했다. 경찰은 군중을 저지했으나, 군중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경찰의 제지를 뿌리치고 남대문 시장,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으로 향했다. 피를 흘릴 각오가 돼 있다는 의미로 ‘붉은 수건’을 팔뚝에 두른 학생들이 대한문에 다다르자,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칼을 휘두르며 학생들에게 돌격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의 체포로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렸고, 3월5일 학생운동을 계기로 만세시위 운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경성의전 조선학생중 15.4%가 참여

길영희·한위건·백인제 등 적극적 시위

 

길, 퇴학후 의사 꿈 접고 인천서 계몽운동

제물포고 교장 등 ‘지역교육 큰 스승’

 

한, 상해 임정 활동 ‘독립운동 본격화’

 

백, 복교 이후 학업 마치고 백외과 개원

전 재산 기부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 세상을 바꾸는 학생들의 용기

3·1운동과 3·5 학생운동에 가장 많이 참여한 학생들은 길영희와 한위건이 재학 중인 경성의전 학생들이었다. 한국인 학생 15.4%가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일제의 재판을 받았다.7 당시 경성의전 학생 가운데 길영희와 한위건, 그리고 백인제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경성의전 1학년 대표 길영희는 퇴학 조치로 의사가 되는 길이 막히자, 24세에 다시 배재고보 4학년으로 편입했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뒤, 10년간 모교인 배재고보와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인천으로 옮겨 농촌 계몽운동에 매진하다 인천중학교의 졸업생과 학부모의 제안을 받아 1945년 광복 이후 인천중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이후 6년제 중학교 과정이 중학교 3년제·고등학교 3년제로 바뀌어 인천중과 제물포고등학교의 교장(1945~1962)을 겸하며 인천 교육의 큰 스승이 된다.

2학년 한위건은 3월 독립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했다가 일본 유학, 동아일보 기자를 경험한 뒤 조선공산당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3학년 대표 백인제도 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파고다 공원 인근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다가, 군중들의 만세 소리를 우연히 듣고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일제의 조사가 경성의전 동급생이나 후배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거짓 진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백인제가 학생 대표로 활약했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8 백인제는 옥고를 치르고 학적을 박탈당했으나, 다시 복교해 경성의전을 졸업했다. 이후 서울 서동에 백외과를 개업했으며, 전 재산을 기부해 우리나라 최초인 민립 공익법인인 ‘백병원’ 재단법인을 설립한다.

백인제
백인제

경성의전에 진학해 의사를 꿈꾸던 세 청년은 독립운동을 계기로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세 청년뿐만 아니라 수만명의 학생들이 이를 계기로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했다. 역사에 이름이 남은 학생 대표들은 물론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겠다’는 각오로 광장에 뛰어들었고,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자유, 평등,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꿈꾼 학생들의 용기는 일제강점기 때도, 이후에도 변화의 선두에 서서 세상을 바꾸고 있다.

[출처]

1) ‘이형원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19년 3월8일 2) ‘길영희 판결문’, 국가기록원, 1919년 11월6일 3) 김기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위건’, 한국중앙학연구원 4) ‘길영희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19년 6월25일 5) 조한성, ‘만세열전’, 생각정원, 2019 6) ‘강기덕 신문조서(제4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19년 7월29일 7) 김상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참여 양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19 8) ‘한국의학의 백년야사’, 의사신문, 1972년 6월5일

/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