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에 세계 공급망 약점 드러나

가성비 중심 설계 심각한 한계 봉착

유럽, 지난해 ‘드라기 보고서’ 발표

경제구조 문제 진단, 전략과제 제시

직결산업 밀집 道, 허브기능 강화를

장정석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장정석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팬데믹은 단순한 경기침체를 넘어 글로벌 경제의 작동방식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중간재 수급 차질, 물류 마비, 전략물자 부족 등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글로벌 공급망의 구조적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유럽은 팬데믹 이전부터 생산성 정체, 산업투자 부진, 디지털·녹색 전환의 지체 등 만성적인 경쟁력 저하에 시달려 왔고 공급망 위기는 이러한 취약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글로벌 생산전략은 오랫동안 ‘가성비’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다. 더 낮은 비용과 안정적인 거래처를 찾기 위해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했고 효율성을 극대화한 공급망이 구축되었다. 중국은 이러한 과정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잡았으며, 우리 기업들은 ‘중간재 공급-완제품 수입’ 방식으로, 유럽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산업재 수출-소비재 수입’ 방식으로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되었다.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이 같은 공급망 구조는 팬데믹과 지정학적 충돌이 겹치면서 심각한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유럽이사회는 2023년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에게 유럽의 경쟁력 회복 전략 마련을 요청, 이듬해 ‘드라기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보고서는 유럽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며 ▲공동투자 확대 ▲단일시장 완성 ▲산업정책 체계화 ▲인적자본 투자 강화 ▲공급망 회복력 확보 등 다섯 가지 전략과제를 제시하였다. 특히 공급망 관련 과제는 보고서의 방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항목으로 단순한 물류 문제가 아닌 전략적 자율성과 산업 생존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공급망 리스크는 한국도 피해갈 수 없었다. 경기지역의 자동차·전자 산업은 팬데믹 당시 핵심 부품 수급 차질과 물류 마비로 생산이 중단되었고, 2021년 중국이 식량 안보를 이유로 요소 수출을 통제하자 요소수의 9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던 국내 물류망은 큰 혼란에 빠졌다. 당시 한국은행 북경사무소장으로서 주중 한국대사관의 연속된 대책회의에 참여했던 필자는 의도치 않았던 공급망 리스크의 발생과 해소 과정을 현장에서 생생히 목격했다. 팬데믹 이후 리오프닝과 함께 자연스러운 회복을 기대했지만, 예상을 빗나갔다. 불확실성은 지속되었고 2025년에는 미국의 관세 압박에 대응해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를 시사하면서 전략물자의 무기화 가능성까지 부각되었다.

문제는 공급망 재편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회복력 강화에는 비용 증가가 수반되고 효율성과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OECD는 무리한 리쇼어링이 세계 무역을 최대 18%, 글로벌 GDP를 5~12%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IMF는 단순한 공급선 확대가 아니라 품목별 전략적 대응, 계약구조 정비, 기술 내재화 등 다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드라기 보고서는 공급망 안정성 확보를 민간 자율에만 맡겨서는 안되며 공공과 민간, EU-회원국-지역산업 생태계가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전략산업 지정, 공동투자 기금, 데이터 기반 조기경보 체계 등의 수단이 제시되었다.

경기도는 이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반도체, 자동차, 정밀부품 등 글로벌 공급망과 직결된 제조업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급망 회복력 강화는 주체별 과제를 명확히 하고 체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기업은 중국 의존도가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공급선을 다변화하고 기술 내재화와 계약구조 개선을 병행해야 한다. 중앙정부는 현재 추진 중인 전략품목 R&D, 금융·세제 인센티브, 국가단위 조기경보 시스템 및 데이터 기반 분석 체계를 보다 현장 중심으로 보완·고도화해야 한다. 그간 경기도는 반도체 기술개발 및 실증 지원, 지역맞춤형 위기대응 등으로 공급망 재편정책을 수행해왔다. 앞으로는 중소·중견기업이 보다 활발히 참여할 수 있도록 민관 협력을 조율하고 개방형 공급망 생태계의 허브로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공급망 회복력은 향후 산업 경쟁력의 지속성을 좌우하는 핵심요소이다. 글로벌 공급망과 직결된 산업이 밀집한 경기도는, 축적된 정책 역량을 바탕으로 국가전략의 테스트베드이자 전국확산의 선도자로서 그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장정석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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