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집 마룻바닥 그리고파
파란날개 선풍기 80년대 여름풍경
못난이 삼형제 인형·호랑이 액자
日 살던 고모가 사온 비싼 벽시계
매일 일력 찢어, 그땐 왜 재밌었지
종종 그림을 그린다. 디지털 드로잉을 시작한 이후로는 아무 때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좋다. 물감이며 물통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카페에서나 작업실에서나 침대에서나 언제든 그릴 수 있다. 그저 태블릿만 충전을 잘해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태블릿 속 흰 도화지 화면을 한참 쳐다보다가 무엇을 그릴지 결정했다. 노란 마룻바닥. 예전 내가 자란 집의 그 마룻바닥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80년대 풍경이다.
80년대라면 벽과 천장은 짙은 나무색이어야 한다. 나무 패널을 모양 있게 붙인 천장엔 긴 형광등 하나가 달렸다. 알루미늄 전등갓을 타고 내려온 동그란 스위치엔 빨간 똑딱이 버튼이 있는데, 어릴 땐 그걸 한 번 눌러보고 싶어 아빠를 졸랐다. 그러면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동그란 스위치 앞까지 데려다 주었지.
여름 풍경이어야 한다. 왜냐면 선풍기를 그리고 싶으니까. 자고로 선풍기라면 파란 날개가 시원해 보이지. 달깍달깍 소리를 내는 풍속 버튼과 타이머. 스크린을 여닫는 문짝이 달린 텔레비전이 있었고, 식탁 위 밥보자기를 걷어보면 아침에 먹다 남은 반찬 그릇과 식은밥이 있었다. 아침마다 배달되던 하얀 병 서울우유는 종이 뚜껑 벗겨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델몬트 주스 병엔 노란 보리차가 담겨서 유리컵 한가득 따라 마시면 가끔 보리알이 씹히기도 했다. 꼭 여름이어야 하는 건 마루 문밖으로 초록 나무들을 신나게 그리고 싶어서였다. 넓지도 않은 마당이었다. 아니, 그땐 아주아주 넓다고 생각했다. 마당에서 강아지도 키울 수 있었고, 딸기도 심었고, 포도나무도 있었으니까. 우리 세 자매는 마당에서 땅따먹기도, 고무줄놀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나중에 훌쩍 자란 다음 그 옛집을 찾아갔을 때, 그 낮은 담장과 좁은 마당에 화들짝 놀랐더랬다. 여기서 그 많은 것들을 다 했다고?
나는 전화기도 그려넣었다. 그때 우리 집 전화번호는 국번도 없이 2300이었다. 아직 그 번호를 기억하다니. 시외전화를 할라치면 전화 교환수를 거쳐 걸었는데. 전화요금이 비싸다고 시외전화 속 할머니는 얼른 끊으라고, 잘살고 있는 것 알았으니 됐다고 소리쳤다. 까맣고 맨질맨질하던 그 전화기를 닮은 빈티지 제품을 장식용으로 산 적이 있다. 초등학생 딸은 그걸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도대체 이 전화기는 어떻게 번호를 누르는 거야?” 물었다. 따르륵따르륵 다이얼을 돌릴 줄도 모르다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못난이 삼형제 인형은 어느 집에나 있었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족두리를 쓴 인형도 어느 집에나 있었다. 좀 비싼 인형들은 유리 상자 안에 들어있기도 했다. 만지지도, 가지고 놀지도 못하는 인형이 어느 집에나 있었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다. 호랑이 액자도 흔했던 시절이었다. 어떤 호랑이는 자수 호랑이였고, 어떤 호랑이는 자개였다. 우리 집에도 커다란 호랑이 액자가 있었는데 자수였는지 자개였는지는 이제 모르겠다. 어흐흥, 커다랗게 입 벌린 모습만 기억날뿐.
뎅그렁뎅그렁 종이 울리는 괘종시계도 집마다 있었지만 우리 집 시계는 조금 달랐다. 일본에 살던 고모는 꽤 비싼 벽시계를 선물해 주었는데, 그 시계는 십오 분마다 노래가 나왔다. 십오 분이라니, 세상에 얼마나 시끄러운 시계였을까. 놀랍게도 그 시계는 아직 엄마와 아빠 방에 있다. 고장난 적도 없이 아직도 십오 분마다 노래를 흘려보낸다. 그러니까 40년도 훌쩍 넘었다는 거다. 그게 말이 돼? 일 년에 두어 번 엄마 아빠 집에 가면, 나는 안방에서 잠들지만, 시계의 노래에도 잠을 깨지 않는다. 뼛속까지 이미 스며들어 아무 이질감도 없다. 매일매일 우리는 일력을 찢었다. 습자지처럼 얇은 일력 종이는 찢는 맛이 있었다. 손 안에 쥐고 가만히 구기는 일이 그때는 왜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어제도 언니가 찢었는데! 오늘은 내 차롄데! 언니가 또 찢었어!” 사흘에 한 번은 그렇게 울었다. 80년대 여름날을 그리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김서령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경인일보 Copyright ⓒ kyeongin.com
